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진섬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1981년 여름부터 압량면 삼풍동, 사동, 경산시 계양동 일대에 제2지구 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그 구역 내에 있는 모든 분묘를 이장하게 하였고 진산 진씨도 쇳골에 있는 선영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그 중 한 묘는 여간 깊이 파도 관의 흔적이 없었다. 다시 더 파내려 갔는데 광이 나타났다. 돌도 아니고 또 단순한 석회광도 아니고 마치 요즈음 건축에서 돌을 섞어 연마한 콘크리트 바닥과 흡사했다. 여간 단단하지가 않아 징으로 3일이 걸려서 겨우 그 일각을 깨었는데 두께가 20cm나 되었고 그 안에 누런 관이 나타났다.

400년이 되었는데도 썩지 않은 이 관은 보통의 관의 두배의 크기이엇다. 바로 진섬의 무덤이었다. 무덤의 관이 너무도 단단하기에 이장이 어려웠고 또 후손의 진정에 의하여 이장이 중단되었다. 임진란에 순절한 의사의 묘를 그대로 모시자는 것이었다. 진섬은 처음 이름을 황이라 하였고 자는 여명, 호를 성재라 하였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 경상도 도사, 창원부사,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 직간으로 이름높은 진관의 손자이다. 진산 진씨는 조선 세종 때 경산시 상방동에 이거하여 세거하여 왔다. 진섬은 일찌기 성주의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한강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기에 주위에서 공자와 그 수제자인 안회에 비유하였다. 진엽은 그의 아우이다. 자를 여회, 호는 낙재이다.

임진란에 형제는 함께 의거할 것을 결심하여 포의 종군하였다. 최응담, 박응성에 호응하여 남천면에서 저항하고 다시 욱수동 망월산성에서 항거하였다. 그후 진섬은 최응담과 함께 영천에서 권응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갔다. 권의병장이 진섬을 대면하고 감탄하면서 이러한 양장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고 반가와했다. 정유재란 때 아우 진엽과 함께 곽재우가 지키는 창녕 화왕산성에 입성, 공격해온 적을 격퇴하고 다시 적정을 정탐하기 위하여 적진 깊숙히 들어서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정한강이 진섬의 순절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 제자들을 시켜 그의 주검을 거두어 고향에 정중히 장례지내게 하였다.

1981년 구획정리사업으로 그의 무덤을 이장하려고 팠을 때 전기한 바와 같이 견고하고 가히 이장이 불가능하였다. 왜병도 빼앗지 못한 의사의 정기를 위하여 스승 한강은 사람을 시켜 애제자의 장례를 정중히 치렀다는 옛 기록이, 그 무덤으로 모아 수긍된다. 후손이 경산시 상방동, 옥곡동, 정평동과 압량면, 진량면에 살고 있다.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