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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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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상주(尙州)
출생시기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1522년(중종17)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검열(檢閱), 부수찬(副修撰)등을 역임하다가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강원도 도사(都事)에 좌천되었다. 1530년(중종25) 헌납이 되고, 그후 모친의 봉양을 위해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외직(外職)을 맡았다가 봉정대부(奉正大夫), 예빈첨정(禮賓僉正)을 거쳐 1541년(중종36)에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도임(到任)하였다. 주세붕은 1541년(중종36)부터 1545년(인종1)까지 군수로서는 드물게 5년이란 긴 기간을 재임하면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그 치적이 컸다.

부임하던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8월에 지금의 영풍군 순흥면 내죽리 영귀봉을 안고 도는 죽계천(竹溪川)옆에 있었던 숙수사 구지(宿水寺 舊趾) 백운동에 고려말의 학자 순흥인(順興人)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워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이어 1543년에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서 백운동서원을 창설했다. 위와같이 주세붕은 소수서원을 창건하여 숭유양현(崇儒養賢)과 흥학(興學)에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백운동서원의 전말기(顚末記)인 죽계지(竹溪誌)를 편찬하였다.

이 죽계지는 1803년(순조3) 안시중(安時中)이 처음으로 간행했고, 1824년(순조24) 안병렬(安昞烈)이 3권 1책으로 줄여 중간했다. 제1권은 안씨행록(安氏行錄)· 풍기속상기(豊基俗尙記)· 고적기(古蹟記)이고, 제2권은 백운동서원기· 학전기(學田記)· 장서록(藏書錄)이고, 제3권은 백록동부(白鹿洞부) 및 그 제술(題述)등을 수록하였다. 주세붕의 자서(自序)와 안병렬의 발문(跋文) 및 백운동 학규(學規)· 가장(歌章)· 사부(詞賦)· 제문(祭文)등이 들어 있고, 가장중에는 경기체가(景幾體歌)로 된 가곡(歌曲)수십장이 들어있어 진귀하다. 또한 풍기인삼(豊基人蔘)을 처음으로 재배 장려했다.

본래 인삼은 소백산 일대기에서 자연생(自然生)으로 채취되던 것인데 약효가 좋아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조선 왕가(王家)에서의 애용이 커져서 수요가 크게 증가되므로서 주세붕은 풍기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의 인공재배를 시작(始作)하여 성공하므로서 풍기가 오늘날과 같은 인삼의 명산지로 된 것이다. 벼농사와 특용작물등의 여러 농산물의 재배도 적극 장려하여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생의 안정에도 이바지하였고, 경로(敬老)와 효행심(孝行心)도 일깨우는 등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守令)이었다.

1545년(인종1)에 직제학(直提學)을 제수받아 이임하였으며, 그후 도승지(都承旨), 대사성(大司成), 호조참판을 지내고 1551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고려 문종 때의 대학자(大學者)인 최충(崔沖)을 배향하기 위하여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창설하였으며, 뒤에 다시 대사성, 동지성균관사(同志成均事),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가 되었다. 그리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綠線)되었으며. 1554년(명종9)에 졸(卒)하였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고 문민공(文敏公)으 시호를 받았다. 1633년(인조11)에 안향(安珦), 안축(安軸)등과 함께 소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무릉잡고(武陵雜稿), 죽계지,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경심학도(心經心學圖)등 많은 저서와 그가 지은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嚴然曲), 태평곡(太平曲)등의 장가(長歌)와 군자곡(君子曲)등의 단가(團歌) 8수가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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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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