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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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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수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1878년 7월 11일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도량이 넓고 재주가 있어 학문이 남보다 뛰어났고 또한 정의감이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한다. 청년시기에 한학 공부에 힘쓰는 한편 서울에서 발간된 지리, 역사, 수학 등 신문학공부에도 힘을 썼으며 독립신문, 황성일보, 매일신문등을 받아 보면서 나라가 위태롭고 국제정세가 미묘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오직 구국이념에 불타 한 목숨 바칠 것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때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양호사건·임오군란·갑신정변·을유년 거문도사건·갑오년 동학란·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등 매우 국내가 어수선하고 어지러워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들이 서로 이권을 놓고 다투고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본격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한반도에 뻗채고 있어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시기였다. 이러한 때 서울로 올라간 주백운 선생은 임범호, 이상재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지사와 친분을 맺었다.

먼저 남궁억 선생이 조직한 관동학회에 가담하고 서재필 박사가 영도하는 독립협회에 들어가 열렬한 활동을 전개했고 청산유수같은 그의 열변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관동학회 회원들과 의논하고 고향에 돌아와 1907년 10월에 매화에 만흥학교를 설립하고, 인문과 측량과로 나누어 인재를 양성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동의 황만영으로 하여금 사동대흥학교를 설립케 하고 영주학교, 안동화산학교, 영해송청학교 등 학교 설립에 많은 협조를 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 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폐쇄되고 말았다.

1909년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전기덕, 양기택, 윤치호 김구, 주진수 등이 서울에 모여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주진수 선생은 강원도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렇게 대표자가 된 후 최후의 일각까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맹새하고 구체적인 항쟁계획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김구, 양기택, 윤치호 등과 결합하여 400여명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극비밀리에 지도 훈련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만고 역적 이완용은 일인의 앞잡이가 되어 1910년 8월 29일 이조 50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부끄러운 한일합방에 동조하고 말았다 이날 서울 양기택 선생댁에 모인 백운 주진수 선생을 비롯한 김구, 이동령,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백운 선생은 "이제 나라가 망했다 해서 통곡이나 하고 탄식할 때가 아니다. 일인들이 총독부를 설치하고 각도에 총감을 두어 다스리도록 하는 한편 만주 간도에 이민을 시키고 만주 용정을 서울로 정하여 새 나라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을 양성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 하여 각 도에 책임대표를 정하고 백운 선생은 강원도 대표가 되어 각 군을 돌아다니며 서간도에 이민갈 사람을 모집하니 울진에서만도 100여호가 이민가게 되었고 강원도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이민하였다. 이 사실이 탄로되어 데라우찌 일본총독은 경무총감을 시켜 전국의 애국지사를 검거하니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이때 백운 선생도 김구, 이승훈과 같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옥살이 후 또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선생이 뜻한 바에 따라 서간도 봉천성 통하연 할리하에서 신흥학교를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주병웅, 전오규, 이동휘 등과 같이 노서아땅 블라디보스톰으로 이주하여 교포들과 규합 대한민국 의회 해삼위, 기사단, 지인단, 애국부인회, 소년애국단 등을 조직하여 조국광복운동을 활발히 전개 하였다. 그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의 소식을 듣고 만주로 돌아와 동포를 규합하여 3월 13일 5,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만주 용정에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기미년 독립운동의 찬란한 한페이지를 장식하였다.

그 후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청산리 싸움에서 참모로 활약하여 왜병 17명을 사살하였다. 1925년 양기택과 손잡고 고려혁명당을 조직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9월 16일 59세를 일기로 광복의 기쁨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광복후 백운 주진수 선생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59년 3월 1일 울진초등학교 입구에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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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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