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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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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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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관향은 한양이요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며 한의학자인 해산 조헌영(海山 趙憲泳)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20년(庚申) 일월면 주실(注谷洞)에서 태어났다. 전통 있는 선비의 가문이라, 한문과 국문을 배우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문학예술을 갈고 닦아 온 누리를 빛내리라는 큰 뜻을 품고 글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9세에 벌써 시를 지었다한다. 워낙 빼어난 재질이며, 게다가 얽매이기 싫어하는 소탈(素脫)한 성격이라, 왜정하의 학교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중학 과정을 통신강의록으로 독학,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혜화 전문학교(東國大學의 前身)에 입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20세에 문장(文章)지에 3번의 추천을 받고(古風衣裳鳳凰愁 僧舞) 문단에 데뷔한 천재적인 시인이다. 시(詩) 창작(創作)을 계속하여, 청록집(靑鹿集) 박 목월, 조 지훈, 박 두진 공저(朴 木月, 趙 芝薰, 朴 斗鎭 共著)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 여운(餘韻) 등 4권의 시집이 있으며, 시의 원리, 시와 인생, 2권의 시론집과 당시선(唐詩選)이라는 번역시집이 있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후에 한국 시인 협회장, 한국 신시 60년 기념 사업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시단을 위해 지도 역할을 한 공로자였다. 강개(慷慨)한 시정신이 스민 가사(歌詞)도 많이 지었으니, 사육신 추도가, 인촌 조가(仁村 吊歌), 해공 조가, 유석 조가, 영양 군민의 노래, 영양 중학교가 등 그 밖에도 많이 지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희고 뚜렷한 얼굴, 넓은 이마, 안경 너머 영채 도는 세장(細長)한 눈이 인생을 관조(觀照)하는 듯.... 바람결에 머리카락 날릴 듯 장발 신사가 단장(短杖)을 가볍게 잡고 만보(漫步)하는 장자(長者)의 풍인 선생은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예술가 타입이요 지사(志士)의 풍모이기도 했었다. 선(禪)의 경지에 이른 지훈 시와 같이 동방 정취(東方情趣)의 멋과 풍정이 넘실거리는 님이 애석(哀惜)하게도 향수(享壽)하지 못하고, ″아직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라는 절언(絶言)을 남긴채 숙환(宿患)으로 1968년(戊申) 5월 17일 새벽에 별세하니 향년 49세이다. 21일, 문총(文總) 주최의 성대한 문인장(文人葬)을 엄수(嚴修)하였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조 지훈 선생 시비(趙 芝薰 先生 詩碑)가 건립되었다. 1982년 8월 15일 37회 광복절, 내 고장 영양 소년 지훈이 즐겨 놀며 시심(詩心)을 키우던 주실쑤 울창한 숲에 지훈시비(芝薰詩碑)가 문하생(門下生)들의 정성으로 건립되었다. 500여명이 모인 성대(盛大)한 제막식(除幕式)에 뚜렷하게 우뚝 세워진 〃빛을 찾아가는 길〃의 끝 연(終聯)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 되라〃 나라 선비(國士)인 지훈 선생의 50평생은 어둠침침한 근역강토(槿域疆土)에서 빛을 찾아가는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의〃 고행(苦行)의 생애(生涯)였으며, 님의 노래는 비단(非但) 시가(詩歌)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國學)과 논객(論客)으로서의 강개(慷慨)한 외침이 어느 것 하나인들 민족의 슬픈 구름-모든 죄와 허물과 불행-을 걷어 가 버리게 하려는 정성이 깃 든 것 아님이 없었다. 님은 갔으되 님의 노래의 유풍 여운(遺風餘韻)은 언젠가는 삼천리 강토에서 슬픈 구름을 걷어갈 날이 오리라.

이름(諱御) 글자 그대로 동방(東方)에 탁월(卓越)하게 빛나는 별, 지혜와 덕행을 겸비한 선생은 떠났으되, 끼친바 예술과 학문의 업적은 님의 아호(雅號)대로 지란(芝蘭)의 향훈(香薰)인양 한 유방여운(遺芳餘韻)이 사랑하는 조국과 함께 영원하리라.

참고문헌 : 영양군지, 조지훈 전집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함.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 역임.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 등 우파진영의 선두에 서서 활동함. 1947년 ~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1950년 6·25 당시에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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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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