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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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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익

지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44년
시대

상세설명

지산 조호익은 경남 창원 사람으로 서기 1575년 2월에 부모님 담제를 지낼 판인데, 왕후(王后)의 장사(葬事)전이라 국법으로 지낼 수 없게 금지되자, 상주 노릇을 계속하고 있었다. 3월에 경상도(慶尙都事) 최황(崔滉)이 군적(軍籍)정리 관계로 내려와, "고을에서 명망(名望)이 높다"해서 선생을 검독(檢督) 책임자로 선임했다. 선생은 부모복(父母服)을 벗지 못했음과 병이 위중함으로써 직무수행을 못했더니, 최항이 크게 노하여 "대신(代身) 한정(閑丁) 50명을 내라." 독촉하므로 종들을 모두 동원해도 그 수를 충당할 수 없었다. 최황은 "지산에서 그러한 천임(賤任)이 부당하다"는 부하들의 건의도 물리치고 더욱 노하여 매까지 때리고, "토호(土豪)의 항거"라고 상주(上奏)하여 이듬해 3월에 마침내 선생은 지금의 평안남도 강동(江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선생의 귀양살이가 17년이 되던 1592년(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적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우리나라 곳곳을 휩쓸었다. 5월에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대왕이 평양으로 몽진하시니 나라의 위급함이 풍전등화 같았다. 서애는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보다 못하도다"하고 탄복하고, 강동으로 다시 돌아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국권 회복에 힘쓸 것을 말하므로 선생은 즉시 강동, 성천으로 치달아문인 윤근(尹瑾), 박대덕(朴大德) 등과 더불어 충심으로 의거할 것을 호소하여 의병 500여 명의 호응을 얻었다. 전쟁중에도 꼭 초하루와 보름에는 위의를 갖추고 임금님이 계시는 서쪽 하늘을 향하여 사배(四拜)하고 통곡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감동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선생의 명령을 따랐다.

이때 평양을 점령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부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하였으나, 관군은 겁을 집어먹고 꿈쩍을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중화(中和), 상원(祥原)등지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참획(斬獲)함이 심히 많았다. 의병의 세력이 가장 강대할 때, 중화인(中和人) 임중량(林仲良)이 또한 의병을 일으켜 토적하였으므로 왜적들이 허수아비 두 개를 만들어 놓고 그 머리를 베면서 "너가 조호익이냐? 너가 임중량이냐?"하고 고함을 질렀다 하니 왜적이 선생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진중에서는 패리를 쓰고 다로기를 신어 졸병들과 옷차림이 조금도 다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밤중에 급히 부하 참모들을 불러 반대를 무릅쓰고 진을 옮기게 하였더니 과연 적의 기습이 뒤따랐다. 이것을 본 부하들은 모두 크게 탄복하고 선생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욱 두터워졌고, 이를 전해들은 서애 유성룡은 "조호익은 유생으로서 무술을 익히지 않았으나 오직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사병들을 격려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이 만년에 현 대창면 용호동 망회정(忘懷亭)에 집에 옮겨 살다가 서기 1609년 8월 18일,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어루만지며 "이 책도 장차 내가 없음을 서운해 할 것이다."하고 숨을 거두니 향년 65세였다. 공의 학덕과 충의를 경모하여, 유림들이 영천 지산(芝山)에 도잠서원(道岑書院)과 강동(江東)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워 지금도 그를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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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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