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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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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우

순경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창녕
출생시기
1459년(세조 5년)
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자는 순경(舜卿),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고려말엽 좌정승 하성부원군 조익청(夏城府院君曺益淸)의 후손으로 고조는 조신충(曺信忠:강계도 좌익병마사), 증조는 조상명(曺尙明:덕원부사), 조부는 조경무(曺敬武:사직), 아버지는 조말손(曺末孫:영암군수)이다.

1459년(세조 5년) 영천군 영천읍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자라남에 따라 효행이 지극하여 향내에 소문나더니 1494년(성종 2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연이어 그해 별시 문과에 합격되어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벼슬길에 올라 1498년(연산군 84년)에는 정언(正言)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학정으로 나라안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나라의 질서가 바로 잡혀 갈 때 선생같이 어진선비를 그냥두지 않았다. 다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내섬시정(內贍侍正), 예천군수(醴泉郡守)등을 거쳤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는 청백리(淸白吏)로 뽑았다. 백성을 다스리는 본보기로 삼았고, 뒤에 주민들은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또 효행이 지극한 소문을 들은 임금은 옥비(玉碑) 두좌와 소학책(小學)을 하사하였다. 그후 선생은 사옹원정(司饔院正)이란 벼슬에 나갔으나 선생의 55세때인 1513년(중종 8년)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키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극진히 어머니를 섬겼으나 선생이 70세 되던 1529년(중종 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이어 선생 또한 71세에 돌아갔다.

이에 임금님이 하사한 옥비 한좌는 묘비(현 대창면 대제못안)에 세워졌고, 또 다른 한 좌는 창원 북재개동(昌原北芝介洞)에 있는 그의 아내 창원박씨(昌原朴氏)묘소에 세워져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한 집안의 기초가 튼튼해야 그 집은 번영하는 법' 선생같이 효성 있었기에 집안이 번창하였고, 효성 있어야 충신열사를 낳는 것처럼 그의 증손 5형제 중 조광익(曺光益, 호 취원당(聚遠堂))은 효자로써 정려가 세워졌고, 조희익(曺希益)은 임란때 의병을 일르켜 영천복성에 크게 활약하였고 조호익(曺好益, 호 지산...芝山)은 도덕 문장이 당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고 그 후손 또한 저명한 인물이 속출되어 영천, 진주, 밀양, 창원 등지에서 거주하고 명문의 기반을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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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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