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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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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석

건초/내은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79년(고종 기묘)
시대

상세설명

관향은 한양이요, 자는 건초(建初)이며 호는 내은(乃隱) 또는 삼하(三何)라고도 하였다. 지평 조덕순(持平 趙德純)선생의 사손(祀孫)이요 남주 조승기(南洲 趙承基)선생의 맏아들로서 1879년(高宗 己卯) 일월면 주곡동에서 태어났다. 1903년(光武 7年 癸卯) 25세에 한양(漢陽)에 올라가서 족증조(族曾祖)인 석농 조병희(石農 趙秉禧)선생을 같은 나그네의 창문(旅窓)안에서 뵈옵고 나라 일을 의논할 제 나라 형세(形勢)가 급전직하(急轉直下)의 국운(國運)을 돌이키기 어려움을 개탄(慨嘆)하면서 곧 고향에 돌아와, 이제 민족이 살아남을 길은 오로지 세계 열방(列邦)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개명(開明)한 문화 교육임을 깊이 명심하였다. 이에, 주실(注谷)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설치하여 신학문(新學問)의 서적을 구입(購入)하고 강사(講師)를 초빙하여 개화 운동에 힘쓰는 한편,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 大學)에 유학(留學) 보내었다.

선생은 교풍회(矯風會)를 창설하여 허례 폐속(虛禮 弊俗)을 교정(矯正)하고 번폐(煩弊)스러운 옛것을 새롭게 쇄신(刷新)하기에 힘썼으므로 한때는 일월면 주곡동이 전국에서 제일인 문화촌이라 이름났었다. 또한 민족주의에 투철한 선생은 왜정 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절대 반대하여 창씨 하지 않았으며,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철폐(撤廢)하고 솔선(率先)해서 양력 과세를 시행하였다. 한학자(漢學者)이면서도 공연(空然)한 글 자랑이나 하려는 궁문벽자(窮文僻字) 쓰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저술(著述)과 서찰(書札)에 국한문 혼용(國漢文 混用)을 실시하고 권장(勸奬)하였다.

이처럼 우리 고장 근대화의 선구자 및 개척자의 보람있게 선생의 슬하 4남매가 조국 광복 후에 장남은 문교부 문화국장, 차남은 제헌 및 2대 국회의원, 삼남은 경상북도지사, 영애(令愛)는 시조 시인이요 내방가사(內房歌詞)를 취집(聚集) 편찬하여 고장을 빛낸 인재(人材)들 이었다. 선구자의 길은 운명적으로 험난하고 기구(崎嶇)한 것인가. 민족 역사상 대참화(大慘禍)인 6.25동란에 차남이 서울서 납치 당했다는 경보(警報)에 접한 선생이 우리 고장을 점령한 괴뢰군과 타협 아니하고 물 가운데 몸을 잠겨 고성낙일격(孤城落日格)으로 별세하니 향년 72세이다. 계몽저술(啓蒙著述)인 농촌요람(農村要覽)등 여러 책자를 저술하였었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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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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