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관향은 한양이요 자는 자중(子重)이며 호는 사월(沙月)이다. 조광인(趙光仁)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573년(宣祖 6年 癸酉) 영양면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났다. 성격이 호탕하며 비범한 재주에 체격은 8척 장신의 거구(巨軀)였다. 조실부모하여 일찍부터 곤액(困厄)을 겪었으나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19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백씨(水月 趙 儉 先生)와 함께 곽재우(郭再祐)의병대장의 진영(陣營)에 들어가 구국대열에 참가하였다. 대소(大小)사건에 대책(對策)함이 능소능대하였으므로 곽 대장이 선생의 뜻을 존중하였다. 수년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가업(家業)에 근검(勤儉)하며 선비의 도를 닦았다. 선조(宣祖) 갑오(甲午)년에 음사(蔭仕)로 사헌부감찰, 1620년(庚申)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제수하고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27년에 병자호란의 계속으로 국가의 군용전곡(軍用錢穀)이 탕진(蕩盡)되었음을 염려하여 다량(多量)의 곡식을 바치니 인조(仁祖)께서 가상(嘉尙)히 생각하여 자헌대부 중추부사(資憲大夫 中楸府事)를 제수하고 3대를 추증(追贈)하는 은전(恩典)을 내리었다. 선생은 이를 즐겨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자진(自進)해서 나라에 바침은 신하(臣下)된 자의 당연한 도리인데 영화로운 은총을 과람(過濫)하게 받잡기 오히려 미안하다」하고 겸손하였다. 이미 70노령이
라 전선(戰線)에 참전할 수 없어 자택(自宅)의 뒤 안에 제단을 쌓고 밤마다 형제 함께 나라 위해 하늘에 빌며 서향(西向)하여 통곡하니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가히 알 수 있다.
후에 비파담(琵琶潭)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시와 술로 상종(相從)하고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다. 선생은 준수(俊秀)한 위인(偉人)의 풍채에 지략(智略)이 뛰어났으며 언론이 유창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다스릴 재질이요 국량(局量)이라고들 칭송(稱頌)하였다. 1613년에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