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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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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

비중/죽봉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풍양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가규(可硅)문집 제 7권 진사일기는 45내로서 1592년(임진년)의 기록을 모았고 제 8권 진사일기는 28매로서 계사년 이후 무술년(1588년)까지를 적어 놓았다. 그의 친필로 된 초본과 원본은 조성목씨가 보간하고 있다. 사행활 기록은 어머님과 형제 제사(祭祀)에 관한 것이 조금 있고 전부가 의병활동, 민심, 시사, 국사, 전황 등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임란에 관한 야사적인 기록으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가규는 조익(趙翊)의 호이다. 임진년 4월 12일에 왜선 수백척이 부산과 동래 등지에서 나타났다는 소문을 4월 14일에 들었다. 라고 그의 진사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무술년(1598년) 11월 통계사 이 순신이 사천예교싸움에서 적탄에 싸움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 뒤에 12월에 왜구가 물러가고 조정 안에 당파 싸움이 다시 일게되니 불행한 일이라고 탄식하며 이 일기는 끝난다.

그의 자는 비중(斐中), 처음 호는 죽봉(竹峰), 노년에는 가규로 하였고 본관은 풍양 조정(趙靖)의 동생,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2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88년 알성 문과에 급제, 임진란 때는 37세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1599년장령, 나라에서 최 영경(崔永慶)을 무고해서 죽인 정 철(鄭澈)의 죄를 논의함에 공이 계를 올렸다. "전하가 선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죄를 철(澈)에게 돌립니까?" 이 상소로 관직을 삭탈, 공산으로 귀양가서 7년을 지냈다. 그때 쓴 공산일기가 있다.

이승연(李承延)이 지은 행장에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천품이 높고 행실이 엄하며, 기량이 넓고 조리가 강직하고 무슨 일이든지 철두철미 하여 평생에 사람 앞에서 시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임란 때 명군 접반관(接伴官)으로 성심을 다 했으며 전란 후 진주사(陳奏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때 쓴 황화(皇華) 일기도 있다. 목판본은 종손 조우연씨가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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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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