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명시(明時)에 버린 몸이 물외(物外)에 누었더니 값없는 풍월과 임자 없는 강산(江山)을 조물(造物)이 허사하여 나를 맡겨 버리시니, 내가 사양하며 탓할일 뉘 있으니, 상산동반과 낙수서애(洛水西厓)에 연하(煙霞)를 헤치고 동천(洞天)을 찾아들어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처처(處處)에 돌아보니……. 이 글은 조 우인이 늙으막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벌면 매호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면서 지은 매호별곡 첫 구절의 일부이다.
「만강풍류(滿江風流)를 한 배위에 실어오니 표연천지(飇然天地)에 걸린 곶이 무삼 일고, 두어라 이정 셩그려 종로(終老) 한달 어이하리.」 주위의 풍경을 그리고 자신의 천명을 깨닫고 교화와 풍류를 즐기는 뜻으로 매호 별곡의 끝을 맺었다.
예천노포리에서 나서 상주 매호에서 세상을 떴다. 자는 여익(汝益)호는 매호(梅湖), 이재.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 몽신(夢臣)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이 불렀다. 1588년(선조 21년) 진사가 되고 참봉을 지낸 뒤 160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감찰, 평안도 도사(都事)형조정랑, 경성판관이 되었다.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이름이 높고 문집이 있다. 상주 지강(芝岡)서원에 제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