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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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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

숙분/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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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창녕 조씨 현감 계문의 아들로 1454(단종 2)년에 태어났으며 매계 조위의 서제다. 자를 숙분, 호는 적암이라 했다. 선생은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관계에 크게 진출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당대의 석학이며 대문장가였던 형 매계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는 학식과 문재를 지닌 인물이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어학(중국어·일본어)에 뛰어났으며 특히 시문에는 매계보다 웃돌았다고들 한다. 역관으로 명나라에 일곱 차례나 다녀왔으며 명에 갔을 때 안남국 사신과 시를 주고 받아 조선인의 시재와 문명으로 국위를 선양한 바 있으며 1479(성종 10)에는 통신사 신숙주를 따라 일본에 가서 문명을 떨쳤으며 이에 따라 왕이 직접 글을 짓게 해 시험하고 시를 짓게 해 시험하여 그 시문이 뛰어남에 감탄하여 특히 사역원정에 특선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도 두 차례나 더 다녀와 문명을 떨쳤다.

중종의 명으로 김안국이 시작하였던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여 뒤(1797. 정조 21)에 <삼강행실도>와 합본하여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오륜행실도>의 대본을 마련해 준 공로가 있으며 무오사화(1503)에 형인 매계가 유배를 당하자 만년에는 은퇴하여 봉계에 은거하며 울적한 심회를 시로 풀며 여생을 마치었다. 저서에 적암시고(適庵詩稿) 5권, 수문소록 1권, 일기에 백년록 1권이 있었으나 현재 백년록은 실전되어 그 전모를 알 길이 없다.

뛰어난 재능과 역량을 지니고도 제도에 묶여 큰 뜻을 다 펴보지 못한 선생의 묘소는 봉계 여리동 사인봉에 있으며 뒤에 나라에서 공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효강이라 내렸다. 형을 도와 모든 공적을 형에게로 돌린 우애와 불우한 처지를 꿋꿋이 참고 환경을 탓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국위를 외국에 선양한 공을 생각하면 할수록 적서차별에 묶여 보다 큰 능력을 다 발휘치 못했을 선생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선생의 시가 많으나 그중 직지사시(直指寺詩) 한 편을 덧붙인다.

그윽한 숲속, 직지는 큰 도량인데(直指耽耽一道場)
성쇠를 생각하니 일마다 이는 감상(坐看興替事堪傷)
조공있을 땐 승려도 많더니만(祖公在時緇徒盛)
은로 돌아가니 보광전도 황량하구나(恩老辭歸寶殿荒)
소나무 대나무는 빈 하늘을 찔러섰고(松竹斬斷空兀兀)
구름산만 우뚝 솟아 창창하구나(雲山矗立但蒼蒼)
향안리(현감) 모신 이 자리(置此且陪香案吏)
잔 기울여 도연명의 국화주를 들도다(細傾彭澤菊花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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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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