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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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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처음 이름이 중걸이요 본관은 진보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문이 고려 말 조선 초를 통해 가장 뛰어났으며 벼슬길에서도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맡은 바에 충실하고 후진들의 우러러 받듦을 한 몸에 지녔다. 고려조에서는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 주부, 삼사도사 계림부 판관, 사헌부 지평, 성균 사예, 예조 총랑 등을 역임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도 학문과 덕망이 높은 그는 계속 조정에 머물러 1398년(태조 7년)간 의대부에 이어 경연시독관을 지내고 형조 전서에 올라 파면되고 예천으로 귀양 왔다. 이 사이 조용히 지내면서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의 제자로는 별동 윤상이 가장 뛰어나고 이로부터 예천 땅에 학문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문화 중심의 고장을 이루게 했다.

여느 사람으로서는 실의와 비탄에 빠지기 쉬운 귀양길에서도 학문을 숭상하고 풍교를 바로잡고 그 지역 주민을 계도하기란 고금을 통해 수월한 일이 아니다. 1403년(태종1년) 성균관 생원 200여 명이 공을 기용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해 달하는 상소를 하여 검교 한성부윤 겸 대사성에 특임되고 이어 예문과 대제학으로 세자 우빈객을 겸임했다.

작고 후 예천의 향현사에 제향되었으니 그 까닭은 예천에 귀양 와서 예천 문화의 씨를 뿌린 일을 예천의 선비들이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자 한데서 유래된다. 시호는 문정이다.(어떤 기록에는 홍무임신 곧 1392년 공양왕조에 이 곳으로 귀양왔다고도 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 세종실록, 예천군지, 한국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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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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