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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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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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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한문을 배우다가 16살에 예천보통학교와 21살에 대구고보를 마치고 그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하고, 1926년(23살) 법문학부 문학과에 진학하여 단 한 사람의 학생으로서 조선어학 조선 문학을 전공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길을 택하여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한결같이 외길을 걸었다. 1929년 대학을 마치고 그 대학의 촉탁이 되어 조선어사전 편찬을 담당하고 한편 법문학부1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기관지 신흥을 발간하고 다음 해 촉탁에서 조수가 되고 제주도 민요 300여수를 채집했다.

1931년 조선어문학회를 조직하는 등 미개척의 국문학분야에 씨를 심고, 1932년 경성사범학교 조선어 담당 교유, 1934년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1937년 첫째 저서인 조선시가사강(1935년 탈고)을 자비로 출판했고, 1939년 "교주 춘향전"을 출판하고, 인촌의 호의로 보성전문학교 부설 연구실에서 이 인영, 손 진태와 더불어 자유로운 연구에 종사하면서 학문 연구 방법을 세 분이 다같이 민족사관으로 뚜렷이 했다.

자편 연보 1940년 조에 큰 뜻을 품고 경성사범학교를 용퇴하여 보성전문학교 연구실에서 1년간 연구에 종사해 보았으나 "생활을 위하여는 또 다시 직업을 갖지 않을 수 없어" 라고 적으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경신학교, 이화여전, 중앙중학, 동성상업, 천주교신학 등에서 한문이나 습자를 가르치는 강사생활 6년이 계속되었으니 허리띠를 졸라매며, 가난한 생계도 꾸려야 되고 한편으로는 일제가 싫어하는 국문학도 계속해야 했다.

6·25중에는 고향 지보리 노모 슬하에 피난처를 구하여 1952년 봄까지 머물다가 1952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4·19때에는 데모 교수단에 가담하고 한국교수협회의 장이 되어 피의함성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썼고 1963년 제현절에 학술원상(제8회)을 받았으며 그 사이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서거 후 도남학의 계승발전을 목적으로 제자 문생들이 도남학회를 창설하니 그 취지문에 "기미 독립운동 이후 각성한 민족 의지가 새로운 민족사를 꾸미기 시작할 무렵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국문학 연구에 뜻을 두어 평생을 이에 헌신함으로써 최초로 국문학의 학적체계를 세워 이 땅에 학문하는 풍토를 조성해 주신 도남 조윤제 선생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도남학회 설립한다. 본회는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국문학을 민족의 생명체로 삼은 선생의 학풍을 기초로 하여 국문학 발전에 적극 공헌할 것을 다짐한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도남의 학풍은 "민족사관"이다. 곧 국문학이 유기체로서 역사 생성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국문학의 자료를 통해 민족 정신의 근거를 찾고자 한 것이다.

생어민족 사어민족 이것은 친히 쓴(1963년) 묘비명의 일절이다. 민족을 최후의 기착지로 정해 좋고 죽는 날까지 민족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으니 민족사관은 도남의 생활 그 자체였고 도남의 일생은 그대로 우리 민족의 수난의 기록이었다. 2차대전을 치루고 난 세계사의 동향은 장차 아세아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구하려 했다. 이 민족사관이「또 다른 학문의 길」의 개척에 의해서 그 이론 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도 민족사관을 형성시킨 근본 정신은 새로운 차원에서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서 "국문학 개설"과 "한국문학사"는 국문학의 해와 달 같은 존재다.

참고문헌 : 도남남해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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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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