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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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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열부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창녕 조씨로 판교(判校) 언형(彦亨)이 부인의 아버지고 문정공(文貞公) 남명(南冥) 조선생의 여동생이다. 부인은 1506년(중종원년) 병인생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또한 가정 훈계를 배워 여자의 도리를 다하고 나이 차메 월담 정선생 사현(師賢)에게 시집가다. 어른을 섬기고 가장을 받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던중 1555년(명종 10년) 월담선생이 돌아가시니 부인은 애통하면서도 지극한 마음으로 옷을 입히고 염을 하고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니 한결같이 예법을 따르고 묘옆에 여막을 지어 오래도록 모시고저 하였으나 연약한 부인으로서 남자와 다름으로 종을 데리고 아침 저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묘소에 다녔으며 또한 춘하추동 사철의 새옷을 지어 매양 묘소앞에 불사르고 삼녀상이 지나도 상복을 벗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머리에 빗질도 아니하고 목욕도 아니하고 또 몸에 단장도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살펴 한결같이 처음 상주될 때와 다름없이 예를 올렸다. 슬하에는 3남 1녀가 있었으니 장남은 서(序), 차남은 하(廈), 3남은 응(應)이며 따님은 부사 김신옥(金信玉)에게 시집갔다. 이들 자녀중 장남 2남 그리고 따님은 각각 장가가고 시집을 갔으나 3남만은 미혼이었다.

하루는 모든 아들들을 불러 놓고는 [나의 생은 남편이 땅에 묻히는 날에 이미 끝났는데도 지금까지 내가 구차히 살아온 것은 어린 너희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한자식이 미혼으로 있다고 하여서 나의 처음 뜻을 이상 더 저버리겠는가]라고 말하고는 1558년(명종 14년)에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평소 남편과 같은날 죽기를 원(願)했는데 세상을 떠난 날이 달(月)은 같은데 날(日)이 하루의 차이가 났다. 묘는 고령군 지산동 황정산(黃鼎山)에 남편과 쌍분했다. 그후 1564년(명종 19년)에 이사실이 조정에 들어가 명종께서 정열첩을 내리고 정려각을 지으라는 명이 내려 정려각을 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병화(兵火)를 입고 비석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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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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