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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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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치

치숙/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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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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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관은 창녕(昌寧), 5형제 중 제4자로 영천군 금호읍 마단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숙(治叔) 혹은 자경(子景)이라 하며 호는 정재(靜齋) 혹은 단고(丹皐)선생이라 불렀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선생의 조부 조익청(曺益淸)은 고려 공민왕 때에 순성직절 찬화공신(純誠直節贊化功臣) 하성부원군이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니 공민왕조에 여러번 크고 작은 훈공이 있어 공민왕 사당에 같이 배향되어 왔었다.

선생의 아버지 조신충(曺信忠)은 희천군사를 지냈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 왕 위에 오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금화 구은동에 은거하닥 영천창수리로 퇴거하여 선비의 도리와 분별있는 판단으로 집안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정제선생은 아버지의 인품에 힘입어 일찍이 성리학에 뜻을 두고 야은 길재(冶隱吉再)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세종 원년인 기해년(己亥年)에 대과에 급제하여 세종, 문종, 단종 삼대를 섬겨 왔다.

선생은 세종대왕때 조정에서 큰 총애도 있었거니와 세종께서 정치의 근본을 하문하신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헌책(獻策)하시니 가장 평범한 말 속에서 보옥같은 보편적 진리를 말씀하셨으니 진토중에서 금강석을 찾아낸듯한 선비다운 고고함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우리 문화사의 대들보요 학문온상의 산실인 집현전 창설에 참여하여 부제학을 제수 받으시고 만고의 충신 성삼문, 박팽년, 천하의 대문장 김시습 등과 강론(講論)하시면 민족 문화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이바지 하셨다.

단종이 승하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주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외인과 접촉을 일체 끊고 두문불출 하시면서 세조가 있는 서쪽을 향해 평생 좌정하지 아니하셨으며 또한 마음속 깊이 모시던 군주를 잃은 허무한 마음에 평소 저술한 대소문자를 한 곳에 모아 손수 소각하셨다하니 그 심정 헤아릴만하다 하겠다.

이러한 정제 조상치 선생의 인격과 높은 학식 그리고 뜨거운 충절이 수가모옥 낙향생활에서도 우국충정은 변함이 없어 만년에 자정지의(自靖之義)로써 자제비(自題碑)에 쓰기를 스스로 포인(逋人)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모시던 임금님을 구하지 못한 죄인이며, 망명도주 하였다는 뜻이니 그 못다한 충절의 응어리가 가슴 가득히 맺혀 있음을 알수 있다.

이 절개가 후진에게 계승되었으니 곧 계룡산의 동학서원과 영천의 창주서원(滄洲書院)이다. 이 서원은 영천군 근호읍 삼호 1등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조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인하여 소멸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복원되었으니 대창면 어방동 소재 선생 묘소와 지척지간이다. 지금도 창주서원에는 정제 선생께서 친히 애용하시던 벼루와 붓등이 소장되어 있어서 당안에 가득히 풍기는 묵향과 함께 선생의 바른 충절과 높은 가르침이 아직도 가득한 듯하여 옷깃이 저절로 여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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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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