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관향은 한양(漢陽)이요 자는 현보(顯甫)이며 호는 호봉(壺峯)이니 조군(趙 )선생의 맏아들로서 1652년(孝宗 3年 壬辰) 일월면 주곡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자질(資質)이 영특하고 총명이 비범하였으며 안광(眼光)이 쏘는 듯이 빛났다. 여러 학우들과 함께 독서하고 글을 쓸 때에 웅대하고도 광채 나는 문장이었다. 청년시절에 안동을 지나갈 적에 마침 안동부사(安東府使)가 호수(湖水)위에 정자(亭子)를 건축하고 많은 선비를 모아 낙성기념(落成記念)의 문예를 시험하는데 들어가서 장문(長文)을 써서 바치니 부사가 읽어보고 드물게 훌륭한 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1679년(肅宗 5年 己未) 소과(小科)에 급제하고, 아우(趙德)와 함께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 때에 모든 학우들이 이 형제를 존중하고 낙종(樂從)하였다. 1689년(肅宗 己巳) 섣달에 숙종(肅宗)께서 성균관 학생들을 불러 들여 시험을 치르는데 혹독한 추위에 필묵이 얼어붙었지만 선생은 붓을 빼어들고 종이를 펴서 한낮(午正)이 덜되어 글을 지어 매듭 하니 글의 사연과 필치(筆致)가 빛나고 아름다워 시관(試官)이 장원(壯元)으로 뽑았다. 이듬해(庚申) 전시(殿試)에 또다시 장원하니 “조덕순(趙德純)은 연첩장원(連捷壯元)이라”고 한때 경향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전적(典籍)벼슬과 감찰(監察)과 예조좌랑(禮曺佐郞) 및 정랑(正郞)을 역임(歷任)하고 9월에 호서좌막(湖西佐幕 忠淸道伯의 輔佐官)으로 부임하니 도백 이인징(李麟徵)이 또한 연첩장원한 사람이라 뜻이 맞아 오랫동안 도내의 행정에 관여하였다. 오래도록 해결 안 되는 큰 소송(訴訟)이 있어 그 사연이 몹시 복잡하여 판결하지 못한 사건을 도백이 선생에게 위임(委任)하기에 곧 명쾌하게 판결하니 감사(監司)가 시원스럽게 매듭지었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임신(壬申)년에 결성현감(結城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6월에 이조랑(李曺郞)을 역임하고 기성(騎省)을 거쳐 지평(持平)을 배수(拜受)하여 관청의 기강(紀綱)을 확립하였으며, 수원(水原)에서 군병(軍兵)들의 재간을 시험하여 그 상(賞)줌의 남발(濫發)함을 시정(是正)하였다.
1693년(肅宗 19年 癸酉) 서울에서 급서(急逝)하니 향년 42세이다. 숙종께서 관재(棺材)를 내리셨으며 3정승이하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조상(吊喪)하고 만사(輓詞)하며 한강까지 영구(靈柩)를 호송하였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