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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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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승.조규승

귀애.성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귀애 선생의 자는 경휴(景休), 이름은 조극승(曺克承), 관향은 창녕이고, 1803년(순조 3년 10월 1일) 화산면 귀호동에서 4형제(극승:克承,우승:右承,규승:逵承,선승:善承) 중 맏아들로 태어났고, 성제 선생의 자는 경휘(景輝), 이름은 조규승(曺逵承)이고, 1803년(순조 27년 1월 7일) 같은 집에서 태어났다. 이 두 형제는 임란때 충효로 순절한 임계 조경온(林溪曺景溫)선생의 후예로 숙종때 이 지방의 문사며 교육자였던 북계 조용석(北溪曺龍錫)선생의 현손이다.

형인 귀애 선생은 어릴적부터 순후한 성품에 용모가 빼어났고, 부모에겐 효성을 어른에겐 공경해야 하는 사람의 도리를 다 하였고, 차차 자라남에 따라 학문에 열중하며 옛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항상 외우고 마음에 새기며 국내 여러 문사와 친분이 두터웠고 "대학강록(大學講錄)"을 저술하며, 정재 류치명(定齋柳致明)의 문인으로 심학(心學)을 닦아 1831년(순조 31년 4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차 국가시책을 상소하여 국가의 주석이 되어 국정을 바로잡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가정적으로는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둘째 아우인 성제를 손잡고 가르쳐 대과에 급제케 했다. 그 때는 시골선비가 사회에 진출하려면 오직 몇해만에 보는 대과에 급제하는 길밖에 없었다. 노력 끝에 영광이 오는 법, 형의 간절한 소망과 동생의 노력이 열매 맺어 1867년(고종 4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제가 즐거워 했음은 말 할 나위 없다. 이 형제는 서로 우익이 되어 집안의 터전을 닦고 이 고장의 후진을 지도 육성한다.

1877년(고종 14년)에 형인 귀애 선생은 이 세상을 하직하니 봉림산에 안장되었다. 귀애 선생을 추앙하기 위해 세운 귀애정(龜厓亭)과 사당, 200여년 전에 건축된 옛 생가 수많은 유물(옥관자, 옥갓끈, 서간문, 일산, 벼루, 교지, 고서적, 목식기, 목제기)등이 보존되어 있어 사학연구의 자료가 되어 경향각지에서 가끔 찾아들고 있다.

동생 성제 선생은 총명하고 영특해서 5세때 '대학경'의 일장을 외웠다 한다. 1871년(고종 8년) 성현(省峴) 찰방을 지낼 때 밝고 맑은 정치와 높은 덕망으로 주민의 칭송이 많아 내직으로 들어가 지평(持平) 정언(正言)을 역임 5조소로 그 때의 폐습을 바로 잡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다가 고향에 돌아 성리학에 통달하고 하루에도 세 번 자기를 반성하는 좌우명 즉 1.몸가짐은 바르냐?, 2.일을 처리함에 공손했느냐? 3.말을 삼가히 했느냐?를 게시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연세, 덕망, 관작이 이 지방에서 가장 높아 명문대가의 후예로 자랑스러운 전통을 심어주는 실존인물로 추앙받다가 1908년(순종 2년) 82세로 이 세상을 떠나니 화북면 안천동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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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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