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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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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온

여율/임계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48년(명종 3년)
시대

상세설명

신라 고려를 거쳐온 명문 임계 조경온 선생의 자는 여율(汝慄), 호는 임계(林溪), 관향은 창녕(昌寧)이며, 조선 초에 고려의 옛 신하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명분을 내세워 영천군 금호읍 창수리(蒼水里)로 낙향한 조신충(曺信忠)의 5형제 중 맏아들인 조상보(曺尙保:좌사의)의 후손으로 화북면 임당리(林塘里:현지곡초등학교 서편)에서 1548년(명종 3년 戊申)에 태어났다.

임계 조경온 선생은 어릴적부터 효성이 남달라 5살 때 새끼 까마귀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조희장:曺希章, 호송당(松堂), 참봉공)에게 "짐승도 저런데 사람이 어찌 짐승만 못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글을 배우고 자람에 따라 이웃 마을에까지 효동(孝童)으로 알리어졌다.

32살 때 아버지상을 당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잠겼으나 장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이 때 소문을 들은 어떤 위인이 찾아와 "하늘이 낳은 효자"를 위문키 위해 왔다며 묘지를 정해 주었다한다. 지금의 화산면 귀호동 속칭 "어둡이"이다. 이에 선생은 손수 삽을 잡고 "아버지의 살갗에 닿는 흙인데 어찌 남에게 맡기겠느냐?"며 손수 채로 쳐서 깨끗하고 보드라운 흙을 골라 장례를 마치고 낮에는 진종일 묘소에 밤에는 빈소에서 아버지의 은덕을 그리며 지냈다.

그러던중 선생의 45세 되던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임란이 일어나 잔악한 왜병은 우리의 강산을 할퀴기 시작했다. 1592년 7월 26일 낮 과연 왜병들은 들이닥쳤다. 선생은 조금도 놀래고 겁냄없이 묘소앞에 꿇어 앉아 있엇다. 왜병은 소리소리 지르며 창칼로 위협했다. 선생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늠름한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본 왜놈의 무리들도 탄복하고 그냥 되돌아 갔다.

그 날 해질무렵이었다. 또 다른 왜놈의 무리가 다시 닥쳤다. 역시 창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여전했다. 그때 악한 왜놈 한명이 창으로 선생을 찔러 버렸다. 붉은 피는 묘소앞을 물들였다. 이를 본 다른 왜병들은 저희들끼리도 "만고에 드문 효자를 해쳤다"고 꾸짖고 근처에 있었던 절의 중에게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고 가버렸다. 이리하여 묘소는 지켰으나, 아! 출천지효자는 몹쓸 왜놈의 창에 쓰러졌다. 부탁을 받은 중은 선생을 업어 제사에 옮겨 정성껏 간호한 보람도 없이 다음날 새벽 "가난한 선비가 나라의 원수 왜놈의 창칼에 맞아 쓰러져 나라에 충성을 못하고, 양친의 묘소 기슭에서 죽게 되니 그래도 다행이로다"고 남기고 4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이 날은 영천성이 왜군으로부터 보성되던 날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병장 권응수장군도 이틀 뒤 진중에서 달려와 "살아서는 효를, 죽어서는 절의를 다 해 우러러 보나 굽어보나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생애를 마쳤도다"하고 슬퍼했다. 다음해에 선생이 왜놈에게 창을 맞으셨던 그 자리에 장사지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일이 곧 조정에 알리어져 그해에 공조참의로 증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어 충의공 권응수 장군과 함께 귀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되다가 뒤에 회계서원(晦溪書院)으로 옮겨 모셔 효제충신을 가법으로, 시서예절을 이어받아 화산면 화북면 일대의 수많은 후손들이 번연하고 있으며 오가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임계정(林溪亭 : 현 화북면 삼창교 언덕위 붕어듬)은 임계 조경온 선생의 충절을 말 해 주는 듯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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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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