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정환

자유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동래
출생시기
1453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동래요, 자는 자유로 삼수공 귀령의 증손이다. 용궁 포내 (예천군 풍양면)에서 태어난 공은 천성이 어질고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학업에 정진하여 추앙을 받았으며, 공은 평소 "사람으로서 충과 효를 잊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역설하며 덕업상권하고 인보상조 하기를 몸소 실천했다. 일찍 급제하여 26세인 1480년(성종 11년)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그러나 1504년(갑자사화) 연산주가 음탕하여 선비들이 공부하던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삼고 좋은 말을 징발하는 채준사와 아름다운 여자들을 강제로 뽑아 오는 채홍사를 전국에 파송하여 그 말 못할 행패가 날로 심하고 사냥을 자주하여 백성은 시달리고 조정의 법도와 기강이 문란해지고 민심이 날로 변해 갔다. 이를 시정하고자 연산주에게 충간하다가 그 해 갑자사호에 휘말려 맏형 진 및 재종제 광필과 함께 화를 입으니 충절의 집안이다.

공은 연산군 앞에 나아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날로 기울어져 가는 기강을 바로 잡고 착산 정사를 베풀도록 하라고 바른 말로 간청했으나 연산주는 도리어 공을 상주 개운 벽지로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유배지에서도 나라 일을 걱정하여 날마다 목욕재계하고 북쪽을 향해 백 번 절하고 임금이 하루 바삐 잘못을 뉘우치고 밝은 정치를 펴 달라고 지성으로 기원했다.

1506년에 중종이 반정하여 연산군의 폭정은 막을 내리고 새로 등극한 중종은 공의 극진한 충성을 알고 그 해에 홍문관 교리를 제수하였으나 이미 그해 8월에 한 많은 적소에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중종이 공의 부음을 들으시고 평소의 충성심을 찬양하며 슬펴했다.

그 후손들은 공의 풀지 못한 유한이 서러워 500년이 지난 지금도 초상장사를 치룰 때 염습한 매끼를 풀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문례가 전해지고 있단다. 1568년(선조 1년)에 창건된 완담사에 공의 유혼을 모셔 제향하고 묘는 예천군 지보면 마산리에 있다.

참고문헌 : 용궁읍지, 동래정씨 족보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