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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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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모

국렬/추산
활동시기
근대이후
본관
출생시기
1886년
시대

상세설명

풍양면 우망리 출신. 열사. 자는 국렬, 호는 추산. 열사는 어려서부터 골격이 늠름하고 선악의 구분이 분명하며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으며 한학에 열중하였다. 을사조약 후로는 국정이 심상치 않음에 한학을 일시 중지하고 향리의 창남학교에 입학하여 영어, 노어, 중국어 등을 전수하였으니 뒷날을 위한 선견지명 책이었다.

1914년 열사가 27세 때 날이 갈수록 일본의 침략 행위가 극심하게 되자 우국의 의분을 품고 조국 광복의 성업을 기약하고 조국을 떠나 만주로 갔다. 1915년이래 남만주에서 김 구 선생과 형제의 의를 맺는 등 여러 선배동지들과 손 잡고 광복 운동의 기본력을 갖추기 위하여 동포들의 자활 기관을 설치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한편으로는 학술 연마와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4월에 만주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총본영 이었던 군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지배하에 귀속 합쳐졌고 서로 군정서란 기관으로서 항전중 열사는 임시정부와의 연락업무로 2, 3차 상해를 내왕하였으며 특히 서로 군정서의 최고 책임자인 이 상룡의 참모역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2월이래 열사는 남북만주와 조국 북경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을 무대로 일본 기관의 파괴 사업을 주무하면서 일본 관서를 불사르며 적을 7, 8명이나 폭발시킨 대담한 인물이었다. 1925년 6월 11일에 소위 미야 협약이 체결된 후로는 악독한 왜적의 만행과 중국인 등의 박해로 독립운동지사들의 고투가 가중케 되자 일본사람 나까무라를 살해하고 홀로 북만주로 떠났다.

1932년 일본에 의해 만주 괴뢰정부가 수립되자 독립 투사들의 투쟁은 극히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투쟁 방향을 네 가지로 정하였다.
첫째는 조국광복을 성취하지 못할 바에는 왜적과 싸워 순국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중국 본토에 가서 항일 광복 운동을 계속하자는 것이고,
셋째는 강대국의 세력에 의지하여 광복 운동을 계속하자는 것이고, 넷째는 왜적에게 굴복하여 안일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이에 세 번째 방법을 택한 열사는 소련의 힘을 빌어 독립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시베리아로 떠났다가 1939년 초 동지 몇 명과 러시아 땅 아르하라를 다녀서 북만주 삼강성 가목사시로 돌아오다가 적과 충격전을 하던 중에 동지들은 모조리 전사라고 온몸에 총상을 입은 열사는 적에게 체포되어 일본 헌병대에서 온갖 고문을 받다가 생명이 위독하자 보석되어 가목사시 삼남여관(권맹석의 집)에서 순국했다. 조국의 광복을 못 이룬 채 고국을 떠나 25년간의 조국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니 그 날이 1939년 4월 7일이요 향년 52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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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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