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1876년(고종13) 상줄리에서 출생하여 동정 이병호(李炳鎬)의 문하에서 사사(師事)를 받고 이어 면우 곽종석(免宇 郭鍾錫)과는 학문과 사상적으로 뜻이 맞아, 동향인 김택진(金澤鎭)과 같이 자주 교유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선조인 우담(愚潭)의 도학과 다산의 실학을 깊이 연구하여 학교, 전부, 과거, 용인, 종수, 치포에 관한 글을 썼었다.
그러면서도 한말의 국운을 비통해 했는데 기어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곽종석, 이승희, 조정규 등과 서로 내왕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한 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9년 곽종석이 대표가 된 한국 유림 137명의 연서로 파리만국회의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한 유림제1차사건(儒林第一次事件)에 연루되어 유림대표 곽종석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수개월만에 출옥하였다.
그 후 다시 독립운동을 도모하기 위하여 김택진과 같이 만주로 건너가서 유림단과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들렸는데 일본 경찰의 엄한 감시를 받아 다시 건너가지 못하게 되자 원주에 있는 선조의 소구인 검암정사(檢巖精舍)를 1925년 그의 향리(鄕里)로 이건하여 학사(學舍)를 마련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위하여 강학(講學)에 힘써 많은 석학(碩學)을 기르는데 전념하다가 광복후 1960년에 졸(卒)하였으며, 외제집(畏齊集)이 있고 서울 장충단 공원에 세워진 한국 유림단 파리(巴里) 장서 예화비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