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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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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유중/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공은 해주인 승지 정란의 아들로 1517(중종 12)년 개령면 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유중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학문하는 집에서 태어나 배우고 익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564(명종 1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에 율곡 이이 학봉 김성일, 완평 이원익과 동년방이라 일찍부터 교분을 맺고 학문과 도의를 강마하여 친분이 두터웠다. 일찍이 노비의 문제로 권문(권세있는 집)의 무고를 당하여 옥사가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향리에선 물론 사림에서도 그 억울함을 관에 진정한바가 있고 특히 앞의 제현들은 임금 앞에 나아가 공의 억울함을 혈성으로 호소하여 드디어 공의 무죄함을 백일하에 드러내 준 일도 있다.

또한 공은 청렴결백한 전형적 선비로 한 평생을 살다갔는데 작고하자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됨을 알고 앞서 제현들이 부물을 보내는가 하면 방백 및 인근 수령에게 전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른 것은 공의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알게 하는 일면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은, 임진란에 그 아들인 제독 인서공이 조모와 모친을 모시고 안음에서 피난 중 병환으로 조모가 작곡하자 장지조차 얻지 못해 통곡하고 있을 때 함양에 머무르던 체찰사 이원익과 초유사로 안음에 온 김성일이 공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공의 덕을 기리며 믿을 만한 군관까지 보내어 무사히 장례를 치르게 한 것은, 공이 얼마나 평소에 제현들과 마음으로 깊이 사귀었던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공은 학문과 인격면에서만 남의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필법도 뛰어났다 한다. 성균관생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여러 유생들이 손바닥만한 종이를 내놓고, "우리 중의 누가 이 종이에다 율시 40구를 쓸 수 있겠는가?"고 물었을 때 공이 쓸 수 있겠다 하니, "그대가 우리 중에서 가장 잘 쓰면 우리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중에서 장원이 나면 그대가 우릴 위해 술자릴 마련하기로 하세." 이 내기는 처음부터 공의 재능을 염두에 둔 불공평한 내기였으나, 과연 글씨를 완성하고 나니 제생 중의 으뜸이라, 자체 해결이 어려워 당시의 대제학의 심판을 빌기까지 해서, 제생이 술을 샀다고 한다. 공의 필법은 이만큼 정묘한 경지에 있었다 하니 임란으로 회진된 공의 필적이 아쉽기만 하다. 공이 작고하자 나라에서 병조참판을 증직하였고 묘소는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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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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