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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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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충

효겸/팔우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동래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동래, 자는 효겸(孝兼), 호는 팔우헌(八友軒)이며 비와(卑窩) 중대(重岱)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승문원 정자를 비롯하여 사헌부 장령.형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 등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일찍부터 승지 고유(承旨高裕).참판 강한(參判姜翰)등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하고 동방급제(同傍及第)하여 그 개결(介潔)과 학행(學行)을 조정 안에 떨쳤다.

사헌부 감찰때는 권문세가 구애받지 않고 불의를 보면 직간(直諫)하니 임금께서도 그의 그릇을 몹시 아끼시고 근신(近臣)에게 "정모(鄭某)의 강직(剛直)은 옛 간관(諫官)도 따르지 못하리라"했다. 어느 날 영조(英祖)가 편전(便殿)으로 공을 불러 치정(治政)을 논(論)할 때 전대의 세세한 연혁과 치적의 우우(優愚)와 현부(賢否)를 들어 "신이 생각컨데 열성조(列聖祖)가 끼치신 바가 모두 잘 되었다고는 할 수 없나이다"하니 왕이 진로(震怒)하여 "과인이 그대의 강직과 박학을 애중히 여겼더니 이와 같은 불충으로 과인을 대할 수 있느냐?"하고 그 자리에서 파직 시켰으나 공은 태연하게 귈문밖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깊이 깨달아 뉘우치고 즉시 복직, 입시시키고 후한 상을 내렸다.

그 뒤로는 공의 주청(奏請)에 더욱 왕이 귀를 기울이니 관원들이 그를 경외(敬畏)했다. 1779년(정조 3년) 성균관 사예로 승진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涉獵)하며 후진을 기르고 숭조돈종(崇祖敦宗)에 앞장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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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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