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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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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기

매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685년
시대

상세설명

신(臣)이 옛 선비들에게 들은 말입니다만 '천하(天下) 만사(萬事)의 근본(根本)이 임금님의 마은 하나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임금님의 마음이 바른 다음에라야 조정(朝廷)이 발라지고, 또 사방(四方)이 발라져서 만사와 만민(萬民)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는 것입니다. 요순우(堯舜禹) 세 임금이 임금의 자리를 주고 받을 때, 정중하고 친절하게 깨우쳐 경계(警戒)한 말은 불과 열 여섯말 뿐이었습니다.

여러 성인(聖人)들이 서로 전수(傳受)한 심법(心法)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 중용(中庸)이란 것은 불편불의(不偏不倚)하여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요, 인심(人心-물욕)과 도심(道心-양심)은 사람마다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정성스럽게 한결같이 착한 마음을 가질려는 공부가 없으면 인심이 성(盛)하고 도심이 사라져서 사물에 나타나는 일들이, 반드시 지나침과 모자람의 폐단이 있게 됩니다. 반드시 정성스럽게 도심을 가려 가진 뒤라야 인심의 사나움을 억눌러 잡아서, 티가 도심에 들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심을 한결같이 지킨뒤라야 도심의 바름을 유지하여,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바르게 하고 한결같이 한다면 도심이 마음의 주인이 도어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게 되어, 저하(邸下)가 행동하고 말할 때와 정사(政事)를 보고 신하에게 명령할 동안에 잠시도 편의(偏倚)함이 없어지므로 자연히 지나침과 모자람의 차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이 말은 매산 정중기선생이 사헌부 지평(持平) 벼슬을 제수(除授)받아 외직(外職)에서 내직(內職)으로 불려 들어갈 때, 세자에게 간곡히 진언할려고 장문(長文)으로 적은 글의 일부이다. 그의 도학과 충성심이 잘 나타나 있다. 영조 29년, 서기 1753년 정월, 선생의 69세때 일이다.

예론(禮論)에 밝은 선생은 만년에 아버지 함계공(涵溪公)이 지은 '가례혹문(家禮或問)'을 수정보완하여 가례집요(家禮輯要)란 이름을 새로 붙여 완성하고, 퇴계 선생이 지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더 알기 쉽고, 자세하게 풀이하여 '주서절요집해(朱書節要集解)'란 예서(禮書)를 만들었다. 그후 영천지방의 예가(禮家)들이 많이 '가례집요'를 표준삼아 왔던 것이다.

선생이 73세로 별세하던 전날 설사(泄瀉)가 심하였는데 그 때마다 일어나서 바깥에 가서 용변을 봤으며, 아들들이 변기(便器)로 방안에서 용변 보기를 청하였지만 "서책이 있는데, 어찌 방안을 더럽힐 수 있겠느냐?"하고 거절하였으며, 돌아가시기 전에 퇴계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자리를 바르게 펴게 해서 편안히 운명(殞命)하였으니 평소의 고매한 인격의 소치(所致)라고 사림(士林)과 문인(門人)들이 더욱 추모(追慕)하는 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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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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