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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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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응지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진량면(선화동) 압량면(현흥동) 면계에 있는 커다란 못 연지의 몽리면적은 38정이고 넓이가 104ha이며 진량의 문천지와 남산의 송내지가 축조되기 전 조선조 말까지는 군내에서 남매지 다음 가는 크기였다. 이 못은 현흥들, 선화동 일대의 넓은수답 관개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연지를 처음으로 파서 이곳 농민에게 커다란 혜택을 준 사람, 연지의 주인이 농수 정응지이다. 정응지의 자는 원도이고, 1586년(선조 1년) 경주 교촌동에서 출생하였다. 본은 동래이고 참판을 지낸 정개보의 5세손이다.

1592년 25세에 임진란이 일어나자, 형 응례, 아우 응삼의 3형제가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는데 3형제가 모두 출전한다면 홀어머니를 누가 봉양할 것인가 하여 형의 시킴으로 홀로 남아서 노모를 모시고 난을 피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일찍 아버지가 위급할 때는 손가락을 끊어 아버지 입에 드리워 의식을 회복케 하였고, 상을 당하여 빈소를 모시게 되자 3년간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난중에 형 응례가 순절하자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여 더욱 효양에 지력하였으나, 왕성한 혈기는 장부가 되어 위국충절을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아우 응삼은 전공으로 선무 원종 이등공신의 녹권을 받았다. 1604년 진량면 선화동으로 이거하였다. 37세 때의 일이다. 정응지는 근왕의 뜻을 이룩할 수 없었음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은거하여 자연을 벗하고 경서와 역사 책을 즐겨 읽으며 자위하였고, 새삼 입신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아니하였으나 막상 세상을 저버리지 못하였다. 항상 임금을 위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과 세상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생각을 잊지 않았으니 곧 이러한 마음가짐은 울분과 포부를 토한 그의 시가에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살고 있는 거처 앞의 현흥들은 당시 얼마든지 개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농민은 항상 수리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수백만석의 소출의 땅이 그냥 메마른 황무지로 묵고 있었다. 애군우국의 뜻은 적과 싸우는 싸움터에서만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흥농으로 구하는 길 역시 애군우국의 길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오직 이 넓은 들을 수리사업으로 옥토로 만드는 방법을 밤낮 일심으로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정응지에게 일렀다. "그대의 뜻이 기특하도다. 그대에게 큰 못을 주리라. 그대는 이것을 구축하여 한 고을 백성을 구하도록 하렷다." 너무도 신기한 꿈이었다. 밝은날 아침에 밖에 나갔다.

기이하게도 들 가운데 못과 수로를 만들 자리에 눈의 자국이 있음을 발견하자 환희하였고, 신인이 꿈에까지 나타나서 일러 주심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정응지는 사재를 아낌없이 털었다. 지방민을 설득하여 협력을 얻었다. 눈자국에 따라 뚝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금호강 상류에서 보를 막았다. 만세에 이르도록 전하여 유지하라는 뜻으로 만세량보라고 이름하였고, 못은 건흥지라 하였다. 가뭄을 모르고, 가물면 더욱 흥한다는 뜻이다. 평야는 건흥들이라 하였다. 1607년(선조 40년)에 건흥지는 이루어졌다. 정응지 41세 때의 일이었다. 못에 물이 가득 찼다. 몽리자는 만가지를 그의 공덕으로 돌렸지만 정응지는 추호도 공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았다.

신령의 은덕으로 못을 이루고 넓은 들에 관개하여 한 고을사람이 굶주림을 면하여 부유토록 하는 일이 충효의 길에 통한다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정응지는 일찍부터 공명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을 지녀왔었다. 못에 연을 가득 심고 못 가에 한 정자를 지어 애련재라 하여 거기에 거주하면서 빈객을 부르고는 흔연히 즐거워하고 장차 그의 생이 저물어감을 몰랐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가선대부 음직 지중추부사를 특제하였다. 정응지가 간지 삼백 수십년이 흘렸다. 건흥지의 물은 오늘도 만수를 이루고 있고 지금도 해마다 연꽃이 만발한다. 농수 정응지의 시와 글도 죄다 산질하였고 건흥지는 이름은 연지로 불리우고 애련재는 그 허물어진 자리에 후손이 그를 위한 사당을 지어 애련정이라 하였다. 1927년 연지가 수리조합에 이관될 때 정응지의 공덕을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포공비를 세웠다. 후손이 하양읍 환산동, 압량면 인안동(고산) 욱수동 등에 우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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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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