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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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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공

가승/오천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오천
출생시기
1689년
시대

상세설명

공의 자는 가승(可升)이요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임난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鄭大任)의 5세손이요, 영천군 영천읍 녹전동(구 명산리)에서 사인(士人) 사재(思齋)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었고 함부로 말하고 웃는 일이 없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때라도 거만하거나 방자한 기색이 전혀 없어 행동에 규범이 있었다.

14때부터 당시의 석학(碩學)인 훈수 정만양(塤 鄭萬陽), 지수 정규양( 鄭葵陽)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특히 경서를 좋아하여 성현들의 심법(心法)을 배우기에 열중하였다. 두 선생께서 칭찬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은 글을 읽되 외우고 기억하는것만 위주로 하고 깊은 뜻은 소홀히 하는데 이 사람은 반드시 그 본의를 찾아 의리(義理)를 탐구하고 내용을 깨닫지 않고는 그냥 넘기지 않으니 꼭 대성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학문하는 목적은 사람이 해야할 행동규범을 익히는데 있으니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몸가짐을 공경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고 책을 읽고 글짓기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다음가는 일인즉 만약 지식을 얻는데 조급하여 근본 문제를 허술히 한다면 차라리 배우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하는 의론의 전개하여 항상 마음가짐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일은 한갖 제자들을 위한 훈화라기 보다는 공의 자신이 실천한 신조이고 이력이기도 했다.

비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유학(儒學)의 근본을 깨닫고 이론보다 실천을 바탕으로 몸소 행하였다. 사종제인 명고 정간(鳴皐鄭幹)선생이 돌아가시자 공은 슬퍼하며 행장을 지어 선생이 평생에 이룩한 업적을 빠짐없이 후세에 남기고 문적을 모아 문집(文集)을 발간하니 이것이 명고문집이다.

공은 마음과 같이 집도 맑아서 가난하게 지냈어나 조금도 걱정하는 빛이 없이 나지막한 초가집에 거처하는 방의 남쪽에 창을 내어 햇빛이 들어오게 하고는 남창(南窓)이라고 부르며 그 이름을 따서 자기호를 남창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청마루 한간 없이 앞뜰에 나무 한그루를 심어 그늘이 돌아오면 자리를 옮겨 앉고는 그나무 이름을 사음정(四陰亭)이라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어 흥취를 읊은 가난한 학자생활을 하다가 1765년 향년 77세로 끝을 맺으니 뒤에 호조참판 간옹 이헌경(戶曹參判艮翁李獻慶)선생께서 공의 행장을 지어 문집(文集) 2권이 남고 창대서원(昌臺書院)에 배향(配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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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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