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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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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부부

경중/송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효자와 열녀가 한 집안에서 나나 일이 역사상 흔한 일은 아니다. '충신에 효자난다'는 옛말이 있듯이 정일 부처야말로 우리의 귀감이 된다 하겠다. 효자 정일공은 자를 경중, 호를 송암이라 했는데, 1556(명종 11)년 2월 16일 영일 정씨 사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부인이 파평 윤씨 대호군의 딸로 1556(명종 11)년 3월 16일생으로 남편과 더불어 효성이 지극하고 정숙한 부덕을 지닌 분이었다.

선생이 1571(선조 4)년 15세로 진사과에 합격하여 문명을 날렸지만 몸이 약한 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슬픔을 못 이기어 죽만 삼년간 먹으며 애도하여 널리 효자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마침 정진사가 움직일 수도 없이 앓고 있었는데, 부인 윤씨는 단신으로 정진사를 이불에 싸서 엎고 도암담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마침 적은 윤씨를 발견하고 육박해 왔다.

"당신만이라도 사셔야 합니다."고, 정진사를 수풀 속에 감추어 주고 자신은 도암 깊은 물에 빠져 정절을 보전해 죽으니 따라갔던 종 막개도, "내 어찌 주인을 따르지 않으랴!"하고, 못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아내의 희생으로 살아난 정진사는 임진년 그해 겨울에 또한 적에게 붙잡힌 바가 되어 적이 납치해 가려고 했을 때, "내 이 나라 백성이 되어 어찌 너희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준엄히 꾸짖고 거절하며 저들의 죄악상을 또한 들어 꾸짖기만 하니 적이 더욱 노하여 진사를 칼로 베고 말았다.

이때 마침 종 계화의 옆에 있다가, "내 목숨을 걸고 주인의 혈손을 잇게 하는 게 충성이다!"고 생각하고 세 살난 정진사의 아들을 엎고 몰래 뒷문으로 빠져 산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진사 내외의 나이가 그때 36살이었다.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진사의아들은 외가에서 계화의 지극한 보호로 훌륭히 성장하여 대를 이었으며 그 후손이 지금도 김천시 조마면 도암동에 살고 있다.

한 가정에 효자 충신이 났고 열녀가 났으며 주인을 위해 신명을 바친 종이 났다. 이리하여 세상에선 삼강세가로 널리 칭송되었다. 그 뒤 1635(인조13)년에 정진사에게 지평이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으며 부인 윤씨의 정려는 1707(숙종 33)년에 내려져 현재 조마면 도암동에 부부 정려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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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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