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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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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우

천석/초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나주
출생시기
1537년
시대

상세설명

군지(郡誌) 유우(流寓)조의 자랑스런 인물이다. 자는 천석(天錫) 호는 초암(草庵), 본관은 나주(羅州)요 좌찬성 응두(應斗)의 아들이며 1601년 (선조 34년) 63세로 도승지와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버리고 예천군 용문면 복천(福泉)에 옮겨 살고 이 고장에 새 문화를 가져온 분이다.

명문가족으로 할아버지는 시호가 공안(恭安)인 옥형(玉亨)으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곧 당시 법령 조목의 상충을 조절한 항구적 법령이 될만한 것을 모은 책을 쓴 분이요, 아버지는 판중추부사로 14살에 진사가 될만큼 학문이 성취했으며 성품이 중후하고 아량이 넓었으며 항상 생활이 검소하여 관직이 높아도 겨울에 털옷을 입지 않고 아들들에게 노역을 시켜 자립심을 길러 주고 문예보다 근면이 앞선다고 가르친 분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공이기에 일찍 급제하여 27살인 1565년(명종 20년)경 동래, 여주, 광주, 독포어사(督捕御使)를 거치고 1592년(선조 25년) 왜란이 일어나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 공신이 되고, 1597년(선조 30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7월 정유재란이 일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선조임금의 간절한 교서(敎書)를 받았으니 "모든 대신들이 경을 추천하여 "이 난리에 임함이 옳다"하니 경의 아버지가 선왕을 도와듯이 경도 세(世)를 이어 충근(忠勤)하고…군율(軍律)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경이 스스로 결단하라…"하여 임금이 공에게 믿음을 보였다.

또 공의 생활과 성격은 아호(雅號)가 일러 주고 가정 교육이 말하듯이 청렴 강직하고 너그럽고 검소한 것이였다. 그 기질이 환갑 지난 늙은 선비로 하여금 새로운 기지 복천을 찾게 했을 것이다. 일찍 명(明)나라에 사신 가니 신종(神宗) 임금이 공의 탁월한 문장을 가상히 여겨 유엽배(柳葉盃) 6매(枚)를 특별히 내려 지금도 후손들이 가보로 보존하고 있고 세칭 "정 감사"라고 이르며 많은 전설적 설화도 지닌다.

공이 예천에 옮겨온 지 400년이 되는 지금까지 이어져 구전(口傳)되는 설화로 "8도 감사를 살고도 굶어 죽었다"고 한다. 공이 예천에 와서 산 것이 불과 4년 밖에 안되고 그 주위의 형제 자질들이 모두 고관대작이었으니 이것은 실제적 사실 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웃 사람이 지체 높은 공이야 금의옥식(錦衣玉食)하고 평민들보다 편히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살고 있었으니 그것은 공의 가문의 전통적 청렴한 생활 방식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감탄해서 뒷사람들의 교훈을 삼고자 한 것에 기인했으리라.

참고문헌 : 예천군지, 초암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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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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