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조선 인조 때의 문장가 자는 목여(穆如)·백유(伯兪), 호는 청풍자(淸風子), 본관은 청주, 탁(琢)의 셋째아들, 매우 총명하여 어렸을 때 경서의 대의에 통달하고 문명(文名)이 쟁쟁하여 당시의 명유들이 다 경탄하였다. 유성룡·정구의 문하에서 배워 예악·병·형·음양·율력(律曆)·구류·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통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또 필법이 탁월하여 초서의 명필이라 일컬어졌다.
1616년(광해 8년) 처음으로 소촌 찰방에 보직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윤리가 무너지고 기강이 문란해짐을 보고 당세에 뜻이 없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 중국에서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마침 한 할머니가 부채를 팔고 있길래 그 중 한 자루를 쥐어 일피휘지하였더니 부채 장수 할머니가 파는 부채를 먹으로 더럽혔다고 화를 내더니 열 곱의 값을 받고 팔게 되자 그 부채 장수가 매우 고맙다고 인사하더라니 그의 글씨는 중국에까지 유명해졌고 이듬 해(1590년) 여름 돌아왔으며 당시의 명사인 오리 이원익, 백사 이항복 등이 국사(國史)로 대접했으며 임진왜란에 관동으로 피난했다가 난이 끝나자 보문면 고평동에 돌아와 유유자적 했으며 그 뒤로 노곡에 살면서 호를 삼기도 했고 다시 1614년 44세 때 다시 용군현 장야평(長野坪)에 살면서 당시의 명사들과 교유하고 다시 1622년 몽촌(夢村)으로 옮겨 살면서 예천 문화 창달에 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 청풍자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