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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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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한

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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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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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공은 영일인 병절교위 정내신의 둘째로 서울 남소문동에서 1568(선조1)년 1월 30일에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서룡이라 했고 자를 인보라 했다. 공은 자라매 영민하고 효성우애가 돈독하여 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했다 한다. 13세에 이미 시구를 맺을 줄 알았고 특히 효성은 지극했다. 아버지가 다리에 갑자기 종기가 나서 일어서지를 못할 때 삼촌과 함께 병간호에 지성을 다하였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동(한겨울)에 빈소 옆을 떠나지 않아 열 손가락이 다 동상에 터져 진물이 났다고 한다. 13세의 효자라고 인근이 다 칭송을 했다. 그 뿐 아니라,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는 7년을 나랏일에 종사하지 않을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난을 피한 행적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임란 당시 서울 처가에 있었는데 꿈에 <홍의 입은 군인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 깨고는 왜구의 침략을 근심했는데 정작 동래성이 깨진 소식을 듣자 공은 처자와 이별하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러 적진을 향해 거꾸로 내려오기까지 한 효자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 도중, 1592년 7월 7일엔 공자동에서 군수 이우빈의 격문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 고향 봉계로 숨어들어 장정 150여명을 모아 창의하여 흑운산(봉계 서북쪽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9월초 진주 목사 김시민이 거느린 2천 관군이 개령적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공자동 왜적을 치러 왔을 때, 김산 관군과 합세 적을 유인하여 입석판교에서 3전 3승의 전과를 올리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개령의 적이 대거진출 직지동구에서 격전이 벌어져 아군은 사상 1, 부상 1명에 적 참급 13, 사살 수십, 화살을 맞은 나 수 백을 헤아리는 전과를 올리는데 의병을 지휘하였다. 이 전투야말로 김산에서 적을 이긴 전투로서도 값진 전투였다.

그 뒤 김시민 목사가 진주로 돌아가고 가장 최기준 진영에 머물면서 개령 적의 진주진격을 차단하는데 협력하고 있다가 9월 30일에 의병을 이끌고 봉계 태백산에 와 진을 쳤으나 왜구의 대거 진격에 힘이 모자라 의병을 해산하고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97(선조 30)년 후퇴하던 왜적에게 부인 이씨가 끝까지 정절을 지켜 무참히 살해된 비운을 맞기도 했다.

1599(선조 32)년 일단 전쟁이 끝났지만 굶주리며 지은 농사의 곡식을 황간진에 보내는 한편 자비로 인마를 사서 용산 대창에 군량미로 우송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1624(인조 2)년 2월, 이괄의 난에는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함에 나섰고 1634(인조 12)년 양전이 실시되자 그 일에 관여하여 군청에서 일을 보았다. 그러던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 해 10월에는 김산의 군기 군량을 정은신 군기감으로 하여금 남한산성으로 호송케 주선하였으며 (정은신을 쌍령에서 전사), 또한 문경 등지로 발송하여 군량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공은 나라의 큰 전란이 두 번이나 겹친 시기에 사대부로서, 가정에선 출천한 효자로서, 나라에선 의병을 일으킨 지사로서, 군사의 사기를 북돋운 참모로서 일생을 보냈다. 특히 공이 쓴 110년간의 일기인 고금사적은 지금은 실전 되고 없는 조신의 체제를 확실히 알게 해 주었으며 임란에서 병란까지의 사회상·사대부의 국가관·가정관 등을 소상하게 밝힌 평민의<난중일기>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공은 1640(인조 18)년 11월 4일 작고하여 태평산에 잠들었으며 후에 나라에서 그 효행과 충성을 높이 평가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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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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