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입부(立夫)이며, 호는 나암(懶庵)으로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로 1527년(중종 22년)에 태어난 조선 선조때 대신이다. 1566년(명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니 그 명성이 높았으며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李浚慶)이 지인지감이 있었는데 통천서각(通天犀角)을 증정하면서 장래에 나를 대신하리라고 하였다.
1579년(선조 12년)에 우승지(右承旨)에서 함경도 순찰사(咸慶道巡察使)가 되어 니탕개(尼湯介)의 난(亂)을 평정할 때 임금이 운전(雲錢)을 하사하며 격려하여 모든 장병을 훌륭히 통솔하고 특히 호령이 엄숙하여, 적은 감히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그는 지감이 있어 그의 부하에 있던 이순신(李舜臣)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琪)등이 모두 당세에 이름난 장군이었고 그는 관찰사(觀察使)로 다시 임명되어 계속 관북을 지켰었다.
그 후 병조판서로 돌아와 1589년(선조 22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그 해 정여립(鄭汝立)의 난(亂)이 일어나 정철(鄭澈)이 조정에 들어와 정언신 형제는 정여립의 일가이고 친교가 있으므로 옥사(獄事)를 다스릴 수 없다하여 탄핵을 받아 정여립을 심문하는 위관(委官)을 사퇴하였고 그의 형 언지(彦智)도 금부당상(禁府堂上)을 사임하여, 정철이 위관이 되었으며 또 정승의 직도 탄핵하여 파직당하였다.
그 뒤 정여립의 동생 집(緝)이 주옥자(主獄者)의 꾀임에 빠져 높은 신하 수십명을 무고하는 중에 그도 연루되어 남해(南海)로 귀양 갔다가 다시 하옥(下獄)되어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甲山)에 귀양갔다가 1591년(선조 24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 후 선조가 크게 후회하고 직첩을 도로 내주었고 사람에서 가은 소양서원에 입향 하였으며 그의 아들로는 협(協)과 율의 형제가 있었다. 정언신이 일찍이 문경군 가은읍 성저리(聞慶郡 加恩邑 城底里)에 있을 때 빙허루(憑虛樓)를 짓고 동네 입구에 괴화나무(槐花 : 홰나무) 아홉 그루를 심었는데 이때 부터 이 마을 구괴(九槐)라 하였는데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