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본관이 동래로 진사 원충(元忠)의 손자이며 용궁 포내리(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英敏)하고 중후(重厚)하며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가 늘 함께 기거하면서 글 읽는 소리 말고는 다른 음성이 담 밖을 넘지 않을 만큼 우애가 깊어 칭송이 자자했다.
학봉 김성일과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우복 정 경세 등과 도의로 사귀며 경사(經史)와 예학(禮學)에 밝아 선조 때 사제감(司帝監) 참봉(參奉)이 제수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환로(宦路)에 뜻이 없는 공은 굳이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집념할 뿐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피난할 수가 없어서 집 뒤 대동산(大同山)에 숨었다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없이 땅에다 글씨를 써서 "늙으신 어머님의 생사가 걱정이라"하니 적장도 감동하여 풀어 주었다.
만년에 별당 한 간을 짓고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스스로 매오거사(梅塢居士)라 했다. 아우 석문 영방이 효도와 우애의 집이란 뜻으로 「효우당(孝友堂)이란 현판을 걸고 그 뜻을 받들더니 그 현판이 지금도 보존되어 형재간의 우애와 종족간의 돈목(敦睦)을 일깨우는 귀감이 되고 있다. 완당사에 추향되고 문집이 전한다.
참고문헌 : 매오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