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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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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굉

여곽/서계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동래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자는 여곽(汝廓),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동래요 승원(承源)의 후손이다. 인조 때 판교(判校)를 지냈고 청렴하고 성품이 곧고 행실이 뛰어났으며 1624년(인조 2년)에 괄의 난으로 나라의 기틀이 위태로울 때 의병을 일으켜 됫사람의 추앙을 받는 서계 선생이다.

태어나면서 영특하였고 겨우 말하며 글자를 알아 볼 무렵부터 문의(文義)를 통하고 자라나면서 뜻이 도탑고 부지런하며 민첩하여 문장이 울연히 장자(長者)의 기풍(氣風)을 지니더니 재동(才童)이란 소문이 향내에 퍼졌다. 12살 때 그 재질을 고을 원이 시험하려고 동현(東軒)으로 불러 뜰 앞의 대나무를 소재(素材)로 시를 쓰라 하니 공은 서슴없이

맑음은 어진이의 덕이요
곧기는 선비의 절개로다
키우기 함들다 마라
의젓한 그 모습이 대견코녀
라고 읊어서 곧고 높은 지조를 보였다.

약관에 큰 선비가 되고 1529년 임진란을 당하여 문경 청화산(靑華山) 속에서 피난을 하면서도 효도와 우애가 놀라왔으며 평난 후 고장에 돌아와 더욱 성리학에 침잠하고 1603년(선조 36년) 진사가 되어 1606년(선조 3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609년(광해 1년)에 봉상시봉사(종8품)로 출사하여 1610년(광해 2년) 성균관 학정(學正), 1611년 춘추관 기사관, 그 해 겨울 성환도(成歡道) 찰방이 되고 1613년 호조좌랑이 되고, 다시 금교도(金郊道) 찰방이 되었으며 1614년 일본 사신을 동래에서 물리치고 광해 혼정을 피하여 숨어 살다가 인조 반정 후 1623년(인조 1년) 고성군수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왔더니 1624년 이 괄의 난 때 상이 공주로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에 추대되고 스스로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더니 새재에 이르러 대가(大駕) 환궁하고 난리가 진압된 줄 알자 군졸을 흩어 고향으로 보내고 상경하니 상감이 아름다이 여겨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시켰다.

1625년(인조 3년) 청송 부사가 되어 선정르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더니 다시 내직에 들어 여러 벼슬을 거쳐 승문원 판교(종3품)에 이르고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성하의 맹의 굴욕이 있은 뒤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고 문장과 덕행이 날로 더해가니 한 마디 한 글자가 모두 전아(典雅)했고 형제간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세상이 흠모하는 바 되었다.

공은 평소에 후진을 양성할 때 늘 "마음을 바르게 가져라 물욕으로 중심을 잃으면 소인의 둥우리에 떨어지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고 했다. 또 자손을 훈계함에 "너의 잘못을 꾸짖는 이는 너의 스승이요 너를 칭찬하는 이는 너를 치는 비수를 품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사람으로서 나아갈 바를 밝혔다. 공은 효도와 우애의 행실과 적개(敵愾)의 충과 덕업의 빛을 함께 지녀 길이 빛나고 있다. 예천의 옥동정사(玉洞精祠)에 모셨다.

참고문헌 : 예천읍지, 동래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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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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