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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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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도

돈부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오천
출생시기
1581년(선조 신사)
시대

상세설명

장군의 자(字)는 돈부(敦夫), 본관(本貫)은 오천(烏川), 고려명신 정습명(鄭襲明)의 16세손이요, 병조참판 희윤(熙胤)의 장자이며, 선조 신사(1581)년에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굳굳하며 뜻과 도량이 넓고 원대하여 일찍부터 바람을 쫓고 구름을 능가하는 기품이 있어 글과 무예를 함께 익혀 활을 쏘아 백보 밖에 있는 버들잎을 궤뚫는 재주를 가졌으며, 선조 병오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광해조에 이르러 인목대비 김씨 폐모(廢母)논의가 일어남을 보고 의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선비길로 나아갔다. 인조 반정이 일어난 후에 다시 부름을 받고 벼슬에 나아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장군은 오위도총부 부총관 직을 제수 받아 어가를 두호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동문을 지켰는데 성이 함몰될 지경에 이르러 의분을 참을수 없어 선봉에 서서 외치기를 "적군이 이미 성위에 올라 왔으니 몸으로서 적군과 사생결단을 내지 않는다면 도적들을 군왕앞으로 인도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하고 힘을 다하여 싸워 간신히 임금님의 위급함을 구출하였는데 최명길(崔鳴吉) 좌상이 오랑캐와 강화조약을 논의한다는 말을 듣고 울분을 참비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정세를 뒤전치더라도 그 충성된 마음과 노고를 가상히 여겨 호종공신(扈從功臣)훈을 내리고 가선계제(嘉善階梯)에 올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발탁하고 부조증 3대에 추증을 내리었다.

난후에는 서해방면의 국방이 허술함을 염려하여 장군을 장연(長淵)부사로 임명하여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연안의 방위를 굳게하도록 당부하였다. 장군은 정성을 다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효유하여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게하고 몸소 경내를 돌며 민생의 괴로움을 살펴 위로 격려하는 한평 국방준비를 서둘러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위의와 덕망을 펴니 서해 방면이 안도의 숨을 내 쉬게 되었다.

1643년(계미년) 5월 17일에 장연부사의 임기도 마치기전에 득병하여 향년63세로 끝을 맺으니 인조대왕께서 부음(부음)을 들으시고 심히 슬퍼하시며 부의를 후히 내려 예모를 갖추게 하시고 예관(禮官) 곽홍지(郭弘址)를 불러 친히 제문을(賜祭文) 내려 조의를 표하는 글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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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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