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선생의 자(字)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서기 1337년(고려 충숙왕 6년) 12월에 임고면 우항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 수문하시중 일성부원군(守門下侍中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공(公)이고,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영천 이씨(永川李氏)다. 모부인은 아들이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그 교육에 특별한 마음을 써서 장차 대성시키기를 결심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백로가(白鷺歌)를 지어 간곡히 훈계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잇것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이 시조는 동사절요(東史節要), 가곡원류(歌曲源流), 일성군묘비명(日城君墓碑銘) 등에 실려 있는 시조로서 너무나 유명한 시조이다.
관례(冠禮)후는 선생의 이름을 몽주(夢周)라 또 고쳐 불렀다. 선생은 자나깨나 백로가의 훈계를 잊지 않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간직하고 대의(大義)를 굳게 지켜 세상의 물욕에 초연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남다른 재능을 나타내기도 했다.
포은께서는 고려 말엽의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여진족과 왜구 정벌에 문신이면서도 종군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을 분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어려운 외교 문재를 오직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성과를 거두어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퇴패(頹敗)한 고려말의 사회상(社會相)을 바로 잡기 위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경서(經書)를 강의하였는데, 그 강설(講說)이 사람들의 의표에 벗어남으로 모두 의심하였더니 그 뒤, 고려에 처음 들어온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과 포은의 강설한 바가 여합부절(如合符節)하므로 목은 이색(李穡)은 포은이 주자의 성리학(性理學)에 밝음을 극구 찬양하여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까지 했다. 또 자주가례(朱子家禮)를 준수하고 사당(祠堂)을 지어 부모와 조상들의 제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포은을 존경하는 정도가 융숭하였다.
이방원(李芳遠)은 자기 아버지를 문병(問病)하러온 포은의 속 마음을 알아보기 위하여 술 대접하는 자리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배견까지 누리리라!" 하고 하여가(何如歌)를 불러 술을 권하였더니 포은은 이에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단심가(丹心歌)를 불러 일편단심, 충성심만이 있을 뿐이란 것을 보이자, 드디어 방원이 포은을 제거할 계획을 짜서 서기 1392년(홍무-洪武 25년) 4월 4일, 선지교(選地橋)에서 심복(心腹) 조영규(趙英珪)등을 시켜서 공을 살해하였다.
이때 포은의 나이 56세였으며 선혈(鮮血)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忠節)을 나타냈다하여 그 다리 이름을 선죽교(善竹橋)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한다.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듣고 알고 있으면서도 충신답게 또 장렬하게 고려를 위하여 최후를 마친 포은은 어릴 때 부모님으로 받은 교훈을 평생토록 굳게 지켜서 마침내 만고에 빛나는 충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