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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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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

운정/신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469년
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해주 정씨 현감 철견(鐵堅)의 아들로 1469년 감문 탄동(炭洞)에서 태어났다. 자(字)를 운정(雲程), 호(號)를 신당(新堂)이라 했다.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에게 성리학을 배웠는데 퇴계 이화 조차도 선생의 학문을 깊고 정밀하다 칭찬할 정도로 성리학의 대가였다. 1492년 문과에 급제 후 여러직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교리에 있을 때 입궐하니 조정 백관이 다 모였는데 훗날 기묘사화를 일으켜 무수한 선비를 살해, 귀양보냈던 홍경주(洪景舟: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가 찬성(贊成)의 서열에 오른 것을 보고, '저런 위인과 한 자리에 있느니 조용히 고향에 가 학문을 닦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한다.

선생이 기묘사화에 영덕으로 귀양을 갈 때에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유자광(柳子光)이 선생의 덕망을 시기하여 독약든 주머니를 주며, "그대가 이번 길에서 다시 풀려날 가망이 없으니 혹 이것(극약)이 쓰일지도 모르오."했다하며 뒷날 유자광이 귀양갈 때 되려 그 약을 돌려 줬다고도 한다. 중종이 즉위하자 선생은 다시 교리로 복관이 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중 병을 얻어 향리로 돌아갔다 선산(善山)으로 이사했다.

선생은 천성이 맑고 발라 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며 지극히 검소한 분이었다. 젊어서부터 친교를 맺어오던 영의정 강희안(姜希顔)이, 선생이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있을 때(1512)에 잣과 꿀을 좀 구해 주기를 청한 일이 있었는데,
"잣나무는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에 있는데, 태수가 무슨 재주로 잣과 꿀을 구하겠는가?"라고 답을 하여 강희안도 자신의 경솔했던 부탁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하여 깊이 사과했다고 한다. 선생은 대성리학자요 교육자로서 이 지방 학풍을 진작시켰을 뿐 아니라 훌륭한 정치를 한 관리로서 청백리의 본보기이기도 했다. 1512(중종 7)년에 작고하여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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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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