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조선 명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로 광보(光輔)의 아들, 1509년(중종 4년) 19세로 문과에 장원 급제, 1514년 사가 독서하고 1516년(중종 11년)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기사(耆社)에 들었으며 벼슬은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고 대제학을 네 번이나 지내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영경연사를 지냈다. 시문(詩文)과 음률(音律)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해 명나라 사신을 여러 번 접대하여 이름이 높았고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두 번이나 명나라에 다녀 오기도 했다.
젊어서 행검(行檢)이 없고 신진 사류에 밀려 외직으로 나갔으나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간(司諫)이 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기를 "저 사람이 분을 품은 지 오래여서 받드시 앙갚음을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 모두 그의 넓은 아량을 칭찬하였다. 4조(四曹)를 역임하였으며 문장이 탁월하였고 대평재상(大平宰相)이란 칭찬을 들은 그는 만년에 동교(東郊)에 은퇴하여 임 억령·신 잠과 함께 20여년 동안이나 시 짓고 술 마시는 것으로 서로 사귀며 맑은 복을 누리니 풍류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아서 여염 사람들이 공의 자(字)로 자기의 자를 삼는자가 많았다.
참고문헌 : 한국인명사전, 호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