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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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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임

중경/창대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오천
출생시기
1553년
시대

상세설명

고려 명신 정 습명(鄭襲明)의 `15세손,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장군의 나이 40세때 임진왜란 (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왜구는 부산을 함락하고 경성으로 향하니 선조대왕은 의주로 난을 피하셨다. 이 때 왜구는 영천을 경상좌도의 요로라 생각하고 수 만의 둔거 하여 좌우로 연락하고 노략질을 하니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에 장군은 당시 선비의 몸으로 나라를 사랑하여 분개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제종제 대인(大仁)과 더불어먼저 의병을 일으키니 향중의사 정녕(鄭寧), 정사진(鄭四震), 이번(李蕃), 이득룡(李得龍), 조희익(曺希益), 조성(曺珹), 곽회근(郭懷瑾), 신준룡(辛俊龍), 김대해(金大海), 최벽남(崔璧南), 정천리(鄭千里), 정담(鄭湛), 정석남(鄭碩南), 최인제(崔仁濟), 김연(金演), 이영근(李榮根) 등 60여 명이 응해모였고 이어 모집을 더하여 용맹스러운 군사 수십 백인을 얻으니 정대임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이 번을 보내어 성을 버리고 묘각사로 달아난 군수 김윤국에게 성 회복하는데 함께 싸울 것을 말하니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사과하고 돌아왔다.

8월초에는 비안 용궁의 적을 격파하고 8월 21일에는 경주격전에서 공을 세우고, 9월에는 자인, 밀양, 양산등지에서 격전하였고, 1593년 6월 28일 울산 태화진에서 몸에 수십군데 상처를 입고도 종일 독전했으며, 1594년 2월 나라로부터 은환도(銀環刀), 옥각대(玉角帶)를 하사 받았다. 장군은 이와 같이 지(智), 용(勇)만이 아니라 학문 또한 탁월하였음을 팔공산 회맹시를 보아 알 수 있다.

3월에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상주당교(尙州唐橋)에서 적을 대파하고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정영(鄭寧)을 불러 난중일기를 모두 불 사리게 하니 이 또한 장군은 명예와 포상에 뜻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월 8일에 42세로 일기를 끝을 맺으니 영천읍 삼귀동 선산밑에 고히 잠드라. 나라에서 그 충성을 찬양하여 선무원종공신 2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기록되고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에 증직되고 영천시 과전동 창대서원(昌臺書院)에 모시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22권, 25권, 27권, 복재, 영천성복성일기, 창대실기, 영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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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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