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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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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란

재우/운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공은 해주인(海州人) 생원(生員) 정은견(鄭銀堅)의 아들로 감문 탄동에서 출생했다. 자를 재우(載羽), 호를 운재(雲齋)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뜻이 곧도 배우기를 좋아했다. 종형(從兄)인 신당(新堂) 정붕(鄭鵬)에게 배우고 중종조(中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문명이 높았다. 1537(중종 32)년 성균 태학생(成均太學生)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朝)의 신원을 위해 합소의 앞장에 서서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중망의 대상이었던 공은 건강이 좋지 못하여 과업(科業)에 더 정진할 수 없이 향리로 돌아와 았다가 건강이 좀 회복된 후 전라도 경양찰방(景陽察訪)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어 신망받은 목민관으로 이름이 났었다.

그 뒤 1555(명종 10)년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향지(鄕誌, 金泉郡誌)에 공의 저서(著書)에 대동야승(大東野乘)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의 고증은 앞으로도 시간을 요하겠지만 공이 집필했다면 아마 요양중의 기간이라고 생각된다. 공의 증손 후시(厚時)가 개령의 역사인 탄동지(炭洞誌)를 엮은 점으로 미루어 대를 이어 사록(史錄)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공이 작고하자 나라에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하였고, 묘는 선산 무을면 원동 상촌(院洞上村)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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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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