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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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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란종

국형/허백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동래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여 일찍부터 세조의 아낌을 받게 되었다. 어느날 주역(周易)과 원각경(圓覺經)의 우열(優劣)을 물으니 공은, "불교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삼성의 경」과 비교하겠습니까"하니 세조가 크게 노하여 역사(力士)를 시켜 매질학 하였으나 공의 얼굴빛이 태연하므로 그만 두었다. 본관은 동래, 사(賜)의 셋째 아들로 1456년(세조 2년)에 문과에 오르고 1466년(세조 12년)에 중시(重試)와 발영시·등준시에 합격하였다.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이 되고 동래군으로 책봉되었으며, 벼슬은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시호은 익혜공이다. 정유년에 북도병사(北道兵使)가 되어 온성(穩城)에 장성(長城) 사십 리를 쌓았다. 변방(邊方)에 오래 있었는데 갑자기 풍현증(風眩症)이 생기니 막료(幕僚)들이 임금께 알리고자 하였다. 공이 말리기를 "본도(本道)는 오랑캐와 가까이 있는데 병사가 병이 났다고 아뢴다면 임금께서 반드시 놀라서 걱정하실 것이니, 아직까지는 나의 병세를 보다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그 때 아뢰어도 늦지 않다." 하더니 여진족 이마거가 공이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 오려고 하였다.

공은 병든 몸을 일으켜 "병법에는 맞붙어 싸우기 전에 적의 마음을 공격하는 법이 있다"하고 이내 성 아래에 오랑캐 추장 수십 명을 모아 놓고 "조정에서 내게 오진(五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마거를 쳐서 지난날 변방을 쳐들어 왔던 죄를 다스리라 했으니, 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종군하라."하고 공 날짜를 약속하여 보냈다. 이 마거가 이 소식을 듣고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어서 농사도 짓지 못하고 몇해가 지나도록 감히 변방르 엿보지 못하였다.

1484년(성종 15년) 갑진년에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임명되니 강계(江界)사람 박형손은 공이 반역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성종 임금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아시고 박형손을 국문하여 그 정상을 알아 내고 손수 쓴 편지로 공의 사직한 글에 답하기를,「한 지방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모두 그대에게 맡겼으니, 소임이 크면 책임도 반드시 크다, 세력이 무거우면 일도 또한 무겁게 된다. 그러므로 그대를 큰 이로써 모함하려 했으나,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겐 앙화를 줌으로써 악한 일을 한 자는 저절로 형벌을 받게 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마침내 영화롭게 되었다. 그대는 혐의를 품지 말고 내가 변방을 걱정하지 않게 하라」하였다. 그 임금에 그 신하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고 특히 촉체(蜀體)에 능했다. 서울의 돈화문 현판, 흥천사 종명(興天寺鐘銘) 원각사 비음(圓覺寺碑陰)과 지방에 많은 작품들이 전하고 1465년(세조 11년) 구리로 만든 활자 을유자(乙酉字)가 공의 서채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들었으며 그 인쇄본이 구결원각경, 금강경계청, 보현행원품 등 많이 남아 있다.

1469년(예종 1년) 세조실록 편찬과 1470년(성종 1년)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470년(성종 1년) 사은부사(謝恩副使) 1483년(성종 14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두 번이나 명나라를 다녀오고 1467년(세조 13년) 5월 황해도 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군사를 모아 대항하여 난을 평정했다.

참고문헌 : 세조, 성종실록, 용재총화, 조선금석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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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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