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공면, 호는 창파, 본관은 청주, 구의 후손. 아들 시가 가산군수로 있을 때, 작은 아들 질과 함께 가산 임지에 머물다가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켜 가산 관아에 몰려들자 아들이 피신을 권했으나 국적을 막아야 한다고 하며 떠나지 않았다. 아들이 반란군에게 죽고 자신도 반란군을 꾸짖다 살해되었다. 집의 추증, 다시 이조판서,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가증 가산의 충렬사에 제향, 시호는 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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