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정담 장군의 자는 언결, 호는 일헌이며, 야성 정시 15세 손으로, 창국의 아들로 평해에서 태어났다. 경원부판관으로 부임해서 북벌사이 일과 함께 번호를 정벌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글 모르는 자들을 글을 가르치고 효제충신(孝悌忠信)하게하고 농민들에게 벼를 심어 곡식을 가꾸어 벼농사를 짓게하니 모두가 기뻐하고 호세를 공평하게 하는 한편 곤리들의 규율을 확립시켜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정담 장군은 청주 목사로 있다가 호남의 목줄기이요 요지인 김제군수로 제수되자 단기로 부임하였다. 단기로 부임하자 곧 곰재마루에 목책을 만들어 산길을 가로질러 두고 장졸들을 독려하여 하루종일 크게 싸워 적을 많이 사살하고 말았다. 적은 퇴각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날도 저물고, 지리에 밝지도 않고 물자가 다 떨어졌다. 이래서 적은 물러가도 죽고 마니, 할 수 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진을 치고 쌍방이 싸우니 피는 강을 이루고 시체는 산을 덮을 만큼 치열한 싸움이 계속 되었다.
우리 군사들도 오랜 싸움에서 화살이 떨어지고 훈련이 부족한 의병들은 그만 힘이 모자라 지쳤다. 화력과 병력이 열세로 치닫자 해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장군의 부하가 간청하기를, "장군님 물러가 다시 기회를 봐 전세를 갖추어 싸웁시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은 피하려 하지 않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을 무찔러 최후를 마치자 아군은 마침내 군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군민이 애처롭게 여겨 그의 시체를 거두고 의복속에서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장군의 용맹성을 알렸다. 이튿날 적은 전주에 이르렀으나 이 정란이 성안에 의병을 거닐고 잘 싸워 성을 지켰다. 적은 그들의 정예가 곰재에서 많이 죽고 난 뒤라 그 기세가 이미 한풀 꺾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류성룡의 개청에 따라 증 병조참판 시호 장렬공이라 했으며 정려를 명했다. 김제군민이 사당을 세워 충혼을 위로했으나 다시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에 장렬공의 충렬각이 세워져 있다. 곰재 마루에 지방기념물 제 25호로 웅치 전적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