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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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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인동
출생시기
1554년
출생지
1554년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고려(高麗) 상장군(上將軍) 김용(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 안세(德寧府尹 安世)의 8대손(八代孫)으로 증이조판서 열(烈)의 자로 명종9년(1554)에 인동 남산(仁同 南山)에서 태어났다. 7세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때 부친(父親)을 잃고 11세때 학자인 신당 정붕(新堂 鄭鵬)의 자정각(子鄭殼)이 보고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이 아이는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세에 벌써 학문에 통달하여 우주요괄점(宇宙要括岾)을 짖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능히 천하의 제일사업(第一事業)을 할줄 알아야 바야흐로 천하제일의 인물이 된다'라고 원대하고 굉위한 포부를 들어내기도 했다. 23세때 재사(才士)로 추천되었으며 26세 때에는 거유 한강 정구의 질서가 되어 한강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그 때 성주목사로 있던 허잠이 한강에게 묻기를 '남방에서 호학하는 선비가 누구더냐' 하니 호학입지를 보아 이사람이 훗날 나의 스승이 될 만하다'하였다고 한다.

선조28년(1595) 42년때 서애 유성용(西厓 柳成龍)이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여 보은현감이 되어 고을의 부자들과 더불어 매월 초하루 보름에 같이 모여 향약회를 행할 때 백성들의 우환병고(憂患病苦) 등의 딱한 사정을 말하게 하고 힘 닫는데까지 도와주고 덕을 권장하고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염치를 권장했으니 온 고을이 크게 감화를 하였다. 그 후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다시 거창현감, 공조좌랑, 형조좌랑, 용담현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의성현령 역시 반년만에 사퇴한 후 선산 월파촌으로 옮겨 살았다.

광해조때 다시 여천군수,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였다. 인조반정(1623)이 있은 다음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사헌부분령등을 제수하였으나 중도에서 모두 칭병사양(稱病辭讓)하고 이괄의 난때 인조가 공주로 남천했다가 천도함에 행재로 나아가 양재역에서 장령을 제수하고 자정전에서 위정(爲政)의 소견을 물으니 '먼저 마음속에 대강령을 정하소서'하니 이르기를 '대강령이란 무엇인고' '그것은 오직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분발하고 진작하여 마음을 새롭게 한즉 효과가 매우 클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다시 그 후 사언부집의, 공조-이조참의, 동부승지, 형조참판,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공은 조용히 학문에만 정진하고 면학요회, 역봉총설급구설, 우주설, 태극설, 도서발휘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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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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