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공은 조선조 성종대를 전후해서 김천 다수동 (미곡동)에서 살았는데 자는 중수, 호는 뢰옹으로 본관은 성산이다. 성산백 수간공의 5세손으로, 수간은 고려말 공조판서를 지내고 성산백으로 봉해졌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결의를 지켜 야은 길재와 뜻을 같이 하고 성주에 내려와 숨어 살았다. 그가 살던 마을은 사세은와를 뜻하여 사와동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목은이색이 공을 찾아와 "일말의 성산, 이곳이 어느 곳인가, 남쪽으로 와서 두문동을 다시 보겠네" 라하여 수간공의 의정을 읊기도 하였다.
뢰옹공은 이런 집안에서 좌부승지 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86년(성종17년)에 성균생원으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학문에 전심하여 경학에 정통하였고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만년에는 행검과 문장으로 세상의 추중을 받아 1506년(중종 원년)에는 정부에서 지평 벼슬을 내려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속세 영달에는 티끌 만큼의 관심도 없이 오로지 학문과 시문에 전념하는 한편 술과 거문고로써 평생을 자오하며 살았다. 위의 시에서 공의 호일하고 청신한 견취를 볼 수 있다.
중종이 이 시를 전해 듣고 문장이라 찬탄하니 이지방 사람들은 그 후손을 가리켜 문장공의 후예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는 악보와 여지에도 수록되어 널리 회구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알려진 명시이다. 향년 52세에 작고하여 묘소는 백옥동 여의항에 있었으나 담배원료 공장 건립으로 이장 되엇고, 묘갈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이장시에 백자 10여점이 유품으로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