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장홍한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장군은 인동(仁同) 장씨 죽정(竹亭) 잠(潛)의 손자며 참의(參議) 곤(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 기위(奇偉)하여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문사(文詞)를 깨우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9세 때에 하루는 동리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했는데 한 아이가 영(令)을 어기자 군율을 시행하는 기용(氣容)이 엄숙해서 감히 옆에 아이가 막지 못했으며 당시를 본 사람들은 훌륭한 장군감이라 칭찬했다 한다.

1592(선조 25)년 초에 선산,개령,김산,지례 네 군의 소모장(召募將)으로 황간의 의병장 박이룡(朴以龍)과 적을 침에 큰 공을 세웠다. 참판 정광적(鄭光積)의 장계로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다가 1594년 3월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니 목사(牧使) 정기룡(鄭起龍)이 친히 염습(殮襲)하며, "괴걸인(魁傑人)이었다."고 칭찬한 바 있다.

장례 때는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예로서 장례지내게 했으며 이여송(李如松)도 만장(輓章)에서,
촉산이 높고 촉수가 깊다한들(蜀山高蜀水深)
그대 보내는 이마음엔 미치지 못하리(不及伊吾送情)
라 애통해 했다. 뒤에 충훈부(忠勳府)에 기록되었고, 형 봉한(鳳漢)과 사촌 사진(士珍)이 임란에 순절하니 세상에서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라 불렀다.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