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장효일은 1589년에 태어나 1648년에 생애를 마친 울진에서 영해에 입양한 기호학파의 선비이다. 그의 자는 중원이고 호는 명고이며 고려 개국공신 장태사의 후예이고 울진부원군 매계장말익이 그의 18세조이며 통정대부 장효현은 그의 아버지이다. 종형인 동명에게 수학하여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니 이퇴계 선생의 이원론적이기 호발설(二元論的理氣 互發說)과 이율곡선생의 일원론적기발이승일도설(一元論的氣發理乘一途說)의 진수를 규명하고자 우계 성혼의 문하인 으봉 안방준에게 사사하여 수 년동안 연학하였다.
그의 학문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율곡의 학설에 점차 마음이 기울어 졌을 때 일단 고향으로 돌아 가고자 영해 고을을 지나다가 잠시 영해 연곡 지금의 영동 입구에서 머무르면서 하루를 쉬게 되었으니 골짜기 울창한 소나무와 그 위에 뜬 밝은 달에 그는 도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어이 그곳을 떠날 줄 모르고 결국은 그 자리에서 머물러 학문을 닦으면서 살게되니 바로 울진 장씨의 영해 입향시조가 된 것이다.
특히 그는 우주의 생성원리에 뜻을 두고 기와 이가 주재하는 우주는 태허하여 크기는 바깥이 없고 시초와 시작이 없고 옴도 없고 감도 없는 읍지즉허요 집지즉무라는 기원론에 사상의 바탕을 두고 부귀와 영화와 벼슬에 뜻이 없이 오직 구름과 달과 자연을 벗하여 학문 닦기에만 힘썼으니 "재주를 감추고 덕을 닦는 것만이 오직 나의 할 일이다"는 교훈을 남겼었다. 수신제가에 힘쓰면서 유유자적 천리상종으로 여생을 즐기는 여가여가에 <허적자도(虛寂自道)>라는 저서를 남겨 성리학의 또 다른 면을 갈파하기도 하며 영남 일각에 자리 잡은 기호학파로서 외로운 삶을 보내다가 1648년 59세로 타계하였다.
그후 기사환국때 서인인 이이명의 영해에 유배되었을 때 그의 손장인 이하가 세의를 못잊어 귀양온 이이명을 환대하다가 남인인 영해 사인 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 후신들이 노론을 고집하고 기호학파를 자처하는 바람에 당쟁이 심하던 그 당시부터 항상 고립하여 은둔하면서 오직 도광양덕이란 문자를 문훈으로 삼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