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중미(中美) 이요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37세손인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박언부(朴彦孚)선생은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 )선생의 8세손이며 고려 문종(文宗)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崔庶)선생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낸 후 중서령(中書令), 문하시중(門下侍中), 도평의사(都評議事)를 지내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선생은 밀성부원군 박언부(朴彦孚)선생의 8세손으로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오르고 고려말인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그 괴수(魁首)인 모거경(毛居敬)이 서경을 침범함으로 밀직부원군 박중미(朴中美)선생은 왕을 호위하며 안유(安裕) ,이방실(李芳實), 홍언박(洪彦博)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보리공신(輔理功臣),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錄大夫)에 가자되고 밀직부원군(密直付院君)에 봉해졌다.
선생의 묘소가 임진왜란의 난리통에 실묘 하였으나 그 후 묘하지석을 찾아내어 묘소를 찾고 지금은 후손들이 수호봉안하고 있다. 묘소는 청도군 풍각면 월봉동 묘봉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의 묘소가 있는 마을 입구에 왕이 선생의 공훈에 하사한 사패지가 수 천평에 달했는데 이 토지를 경계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사패지 표석이 지상 6척 정도의 높이로 세 개가 장승처럼 나란히 우뚝 서있다. 그 가운데 한 개에는 밀직부원군 사패지 표석(密直付院君, 賜牌地 標石) 이라고 음각으로 깊이 새겨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왜정시대의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려고 그 중 한 개를 파서 뽑아내어 눕혀 두었는데 그 이튼날 부터 졸지에 온 마을 안에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온갖 불상사가 잇 다라 일어나 마을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 누구인지 사패지 표석을 뽑은 것이 화근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을사람들은 표석을 원래의 자리에 도로 갖다 세웠다. 그랬더니 후손들은 청도, 경산, 영천, 울산등지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으며 그 외에도 전국 각처에 산재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인의 족보, 인명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