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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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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계

선승/월봉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개성
출생시기
1564년(명종 19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자는 선승(善承)이며, 호는 월봉(月峯)으로 직제학 사원(士原)의 후손이며 군수 흥운(興運)의 아들로 1564년(명종 19년)에 문경군 영순면 왕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름다운 자질을 가져 학문을 좋아하였고 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 수업하여 학업을 성취함으로 명성과 인망이 높았다. 19세에 아버지가 고성(固城)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니 관구를 받들고 고향에 돌아와 장사를 지낸 후 여묘 3년을 하였고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모시고 있던 양(養) 어머니를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四佛山)에 피난 시켰으나 낳은 어머니를 함께 피난 시키지 못함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하여 시를 지어 읊으니 듣는 사람 모두가 슬퍼하며 그의 효도를 찬양하였다.

그 뒤 생·양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나 난리 뒤인지라 장사를 지낼 수 없는 형편으로 애닯아 하는 것을 본 관, 민이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되어 다같이 슬퍼하며 합심하여 장사를 지냈다. 1605년(선조 38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 학록, 학정 박사를 거쳐 1611년 전적(典籍)으로 연서찰방(延曙察訪)을 지냈다.

그의 명망을 듣고 이이첨(李爾瞻)이 사람을 시켜 당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 서로 할려고 경쟁이 심하던 관직인 전랑(銓郞)으로 승진하겠으니 한번 보자고 하니 그는 정색(正色)을 하고 말하기를 "전랑은 좋은 벼슬로 중책인데 내가 어찌 맡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더니 수일 후에 파직을 당하였다. 1612년에 휘호도감 랑청(徽號都監 郞廳)에 참여 하였다가 광해군의 폭정이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그네 자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러지리 온 세상은 바빠도 나는 한가롭구나. 오늘에 전랑이 좋은 벼슬이 아니니 앞문에 나와 크게 웃고 남쪽으로 돌아가네"라는 시를 읊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세상에 뜻을 끊고 영강변에 집을 짓고 시를 지어 즐기며 10여 년이 흘러 인조반정이 일어나 다시 전적(典籍)으로 형조정랑에 옮겼다. 1624년 충청도사(忠淸都事)를 지내다가 병으로 한 때 사임하였고 2년뒤에 다시 형조정랑에서 예안현감(禮安縣監)을 거쳐 공조정랑과 성균관 사예(司藝)를 제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45년 나이 80이 넘어 통정게제의 수직을 받고 84세로 죽으니 상주(尙州)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봉안하고 상향축문은 "바탕이 두텁고 자질이 아름다워 행실이 높으고 학문이 바르니 그의 덕 빛남을 천추에 공경하여 우러러 보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