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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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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영

달부/회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의흥
출생시기
1846년(헌종 12년)
시대

상세설명

박태영(朴泰泳)의 자는 달부(達夫) 호는 회산(晦山)이며 본관은 의흥으로서 1846년(헌종 12년)에 의흥면 수복동에서 출생하였다. 4세 때 서당에 놀러가서 학동들이 천자책을 읽는 것을 듣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외었다고 하니 그의 총명함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 전후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제자설(諸子設)까지도 통달하였다. 25세 때에 두 차례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낙방하였으므로
"하늘이 나를 버리는 구나 "
생각하여 그 후로도 과거에는 뜻을 버리고 이름 있는 여러 선비를 찾아다니며 학문의 깊은 이치를 배워 깨달았다.

1910년(경술년)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그 후부터는 일본 관청이 내리는 명령은 하나도 복종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이에 일본 관청에서는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본 천황(天皇)이 주는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의 금전으로 그를 회유(懷柔)하였으나
"나는 조선국민으로 왜국의 은사금이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에 그들은 일본학자를 보내어 학문에 관하여 토론을 하자고 만나기를 간청하였으나 그들의 간교한 속셈을 이미 알고 있는지라 만나지도 않고 거절하였더니
"조선은 예의지국이라 하였는데 손님을 대하는 예의가 어찌 이러하오?"
함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우리 군왕(君王)을 폐(廢)한 너희들을 어찌 손님으로 대할 수 있느냐?"
고 꾸짖었다. 이에 회유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일인들은 경찰서로 끌고 갈려함에 목침(木枕)을 던지고 지팡이로 후리치며 항거하니 하는 수 없이 곁에 있던 그의 아들을 대신 경찰서로 끌고 가 모진 고통을 주었다. 그는 경찰에게 글을 보내 일제(日帝)의 부당함과 우리나라의 정당함을 깨우쳐 주고 그들의 불법과 무례(無禮)함을 꾸짖어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1926년(병인년) 1월 그는 81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지만 임종할 때까지 일본의 명령은 한 가지도 안 했을 뿐 아니라 평소 기거(起居)를 할 때도 일본이 우리 나라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다. 그가 돌아가시자 그의 애국심을 흠모하는 유림(儒林)이 모여 유림장(儒林葬)으로 장사를 지냈는데 장례행렬이 5리가 넘었고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으로 애도(哀悼)를 한 사람이 2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중용(中庸)에 관하여 깊은 학식을 가졌었으며 중용에 관한 여러 학설(學說)을 모은 『학용집설』(學庸輯設)이란 저서(著書)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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