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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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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담

응천/소요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송은 박익(松隱 朴翊) 선생의 현손이며 우당 박융(憂堂 朴融)선생의 증손이요, 충순공 박승원(忠順公 朴承元)선생의 장자로 이서면 수야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응천(應千)이고 호는 소요당 (逍遙堂)이며 중종조 문인으로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1479년(성종 10년)에 출생하여 1516년(중종 11년)에 사마시에 올라 1524년(중종 19년)에 사사감역(四山監役) 이듬해에 사재감 봉사(司宰監 奉事) 1528년(중종 23년)에 장예원 사평(掌隸院 司評)을 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을묘현량에 천하였으나 불사하였다.

선생이 20세 때 동향 선배인 탁영 김일손(濯영 金馹孫), 오졸재 박한주(朴漢柱)등 선생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하자 충격으로 염세의 뜻이 생겼고 41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등이 화를 당하자 모든 문고등을 불태워 없앴다. 운문산하에 사창(社倉)을 지어 백성들에게 환곡법(還穀法)을 실시케 하는데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 선생과 합력하여 크나큰 혜택을 입혔으며 그 옆에 운수정(雲樹亭)을 지었다.

또 입암 눌연(立巖 訥淵)위에 소요정(逍遙亭)을 지어 그기에 항시 기거하며 명류(名流)들과 어울렸으니 남명 조식(南溟 曺植),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 경재 곽순(警齋 郭순), 송당 박영(松堂 朴英), 청송 성수침(聽訟 成守琛),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등 여러 선생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명류(名流)들은 모두 관로를 좋아하지 않고 산수와 자연에 유연자약하였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관로에 나올 것을 청했으나 완곡하게 거절한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도 그 후 청도 운문산하에 선생과 삼족당 김대유 선생을 여러번 찾아 걸음을 하였다.

그 때 조남명(曺南溟) 선생은 시를 보내고 선생은 화답한 시 등을 보면 모두 초연한 인생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노량진(鷺梁津)의 사육신묘(死六臣墓)를 성묘하고 당시 기호(畿湖)의 명류 청송 성수침을 찾아 시를 주고 받았다. 또한 평소에 이웃에서 가까이 지기(志氣)가 상동하던 경재 곽순(警齋 郭珣) 선생이 사화(士禍)에 희생되었을 때 가서 단장의 만사를 지었다. 삼족당 김대유 선생과는 우연(愚淵)과 눌연(訥淵)으로 서로 지척간에 거처 하면서 더욱 뜻이 같아 조모로 왕래하고 구경토사(究經討史)하고 태신양성( 神養性)하였다. 하루는 어성산(禦城山)에서 사냥하고 있을 때 중종대왕(中宗大王)의 승하를 듣고 잡았던 독수리를 놓아주고 시를 지어 망곡하였다. 그 후부터 이 산 이름을 방응봉(放鷹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1560년(명종 15년) 11월 가훈 10조(家訓 十條)를 만들어 자손에게 보이고 세상을 마치니 향년 82이었다. 묘는 수야칠엽에 있으며 묘각은 칠엽재(七葉齋)이다. 돌아가신 후 8년만인 1568년(선조 1년)에 삼족당 김대유 선생과 같이 동창 운수정(東倉 雲樹亭)에서 위패를 봉안하여 향현사(鄕賢祠)라 이름하고 향례를 받들었다. 당시 전국에서는 순흥 소수서원(順興 紹修書院)이 가장 먼저 향사를 받들었지만 청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우(祠宇)이다. 동창 향현사(東倉 鄕賢祠)는 9년후 1577년(선조 10년)에 박씨 자손이 많이 사는 선암(仙巖)으로 옮겨서 선암서원(仙巖書院)이라 하였다. 그리고 소요당 유고(逍遙堂 遺稿) 3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가훈 10조란 ①승지양친(承志養親), ②기경사장(起敬事長), ③형제화합(兄弟和合), ④부부정체(夫婦情 ), ⑤보본제사(報本祭祀), ⑥충신출언(忠信出言), ⑦독경립행(篤敬立行), ⑧분징계어(忿懲戒禦), ⑨독서불가폐(讀書不可廢), ⑩기업절검(基業節儉)등에 관한 내용으로 안민제세에 관한 내용이라기 보다도 거향양지를 말한 내용이다. 선생은 정헌대부 이조판서(正憲大夫 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선생의 증직은 원래 광해군(光海君) 때 하교되었으나 폐군으로 이를 시행치 않다가 고종(高宗) 때 다시 하교되었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청도문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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